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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시조 형식의 시조를 위하여 /장경렬 등록일 2016.01.30 05:50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1212

단시조 형식의 시조를 위하여

경 렬


시조와 관련된 학술 세미나에 가면, 거의 예외 없이 듣는 말이 있다.

‘시조가 어쩌다 이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었는가? 하이쿠에 대한 일

본인들의 관심과 비교해 보라. 무엇 때문에 시조는 하이쿠만큼 국

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가?’ 이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

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필자뿐이랴. 아마도 시조에 조금이라도 애정

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이어

지는 시조 시인들의 다음과 같은 푸념이다. 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를 어찌 교과서조차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한국의 평론

가들은 시조에 관심을 보이는 데 그처럼 인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푸념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필자 역시

이 같은 푸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필자 역시 교과

서든 평론가든 시조에 대해 응분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 자신이 시조 시인이 아니기 때문인지 몰라도 오늘날

시조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시조가 하이쿠만큼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

하다면 여기에는 시조 시인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시조 시인들이 뛰어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 동안 시조 시단과 가까이하면

서 필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급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책임 운운할 때 필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시조 작품에

대한 질적 평가와 관계되는 거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시조 시인들이 시조

본래의 모습인 단시조 형식의 시조를 외면한 채 이른바 연시조 형

식의 시조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난 2009년 중앙 시조 대

상의 본심에 오른 15인의 작품 133편 가운데 단지 12편이, 중앙 시조

신인상의 본심에 오른 13인의 작품 108편 가운데 불과 6편만이 단

시조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 단

시조에 대한 시조 시인들의 관심이 저조하다고 단언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는 시조 시단의 경향을 짚어보게 하는 하나의 지

표(指標)가 될 수는 있다.

 

이처럼 단시조에 대해 시조 시인들이 저조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시조 시인들은 공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복잡 다단한 현대인의 삶과 의식을 반영하기에 단시조

형식의 시적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함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사설

시조는 기본적으로 단시조와는 다른 창작 의식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리에서 논외의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시조 시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감히 말하건대, 이 같은

이유에서 연시조 형식을 택함은 시조 시인 스스로가 시조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고 다면적인 시적

심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단시조 형식에 담고자 할 때 시조는 비

로소 시조로서의 존재 이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시조의 미덕은 언어의 압축과 감성의 절제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이

를 외면할 때 시조는 시조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

이다. 도대체 삶이든, 의식이든, 시심이든, 시적 심상이든, 현대인의 것

이 과거에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것에 비해 더 복잡다단하다는 주장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단시조 형식의 공간적 협소함을 탓하

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다만 그 자신의 시적 사유가 철저하지 못함을

엉뚱한 변명 뒤에 숨기려는 사람일수도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하이쿠와 달리 시조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바로 단시조 형식이 지닌 절제의 미덕을 시조 시인들이 외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연시조가 있듯 ‘연하이쿠’가

있는지 묻고 싶다. 하이쿠가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또 사람들의 사랑

을 받고 있다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이쿠가 지닌 본래의 특성인

절제의 미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사실 하이쿠보다도 한결

복잡다단한 시적 심상을 아우르는 것이 단시조 형식이다.


 그리고 단시조 형식만으로도 얼마든지 깊고 넓은 동시에 풍요로운 시적 세계를

 개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외면하고 연시조 형식을 취하는 가운데

시조 시인들은 시조의 존재 이유 자체를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은 아

닌지? 시조 시인들이 시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면, 무엇보

다도 시조 본래의 모습인 단시조 형식에 관심과 정성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장경렬)

발췌:《 시조21 》19호, 2010년 하반기

문경선 (2016.02.09 15:29)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단시조 를 좋아하는데, 딱 떨어지는 맛이 매력인 것 같아요, 복잡한 세상일수록 단번에 허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 내공이 쌓여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