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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정신, 혼란한 시대의 등대 같은/이우걸 등록일 2016.01.12 23:19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939

 시정신, 혼란한 시대의 등대 같은

 이 우 걸

 

강홍기는 「시정신 그리고 비시와 반시」에서 시정신은 다른 산문장르와 달리 시를 시가 되게 하는 정신적 특성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곧 시정신이란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를 시로서 성립시키는 그 무엇이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시문학 자체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와 달리 심재휘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글을 통해 시정신이란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시정신이란 곧 ‘왜, 무엇을,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는 시의 위상과 그 독서효과가 바뀌어가는 시대에 시인과 시가 적응해나간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시를 생각하고 짓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는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곧 시정신이며 이것이 곧 시의 존재근거라고 주장한다.

위의 의견들을 참고하여 본다면, 시정신에 대한 여러 견해는 크게 나누어 산문정신과는 다른 면의 시정신과, 한 시인의 시 전편에 흐르는 가치관 태도 등을 내장한 시정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심재휘가 거론하는 정의에 가까운 시정신이다. 가치관 혹은 태도라는 말이 한 시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영혼의 불꽃과 같은 힘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의에는 시정신을 보다 구체적인 느낌으로 갈래지울 수 있는 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글이 후자 편에서 얘기한다 해도 결국은 전자의 범위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그것의 내용과 형식을 완전히 분리하여 다룰 수 없는 것과도 유사한 일이라고 본다.

 

 

무슨 업연(業緣)이기

먼 남의 골육전(骨肉戰)을

 

 

생때같은 목숨값에

아아 던져진 삼불(三佛)군표(軍票)여

 

 

그래도 조국의 하늘이 고와

그 못 감고 갔을 눈

               -①이호우 <삼불야>전문

 

 

이 가을도 조상 앞에

한 자리 못하는 형제

 

 

한 얼굴 강산이요

하나로 둥근 달을

 

 

만고에 섧다는 은하엔

칠석(七夕)이나 있어라

                -②이호우 <추석>전문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 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③황지우 <심인>전문

 

 

예비군 편성및 훈련기피자 일제자진 신고 기관

자 : 83.4.1-지:83.5.31

                        -④황지우 <벽.1>전문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⑤김기택 <사진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1>전문

 

 

허공에 걸린 달의 角,

아파트 위로 떠 오른 초승달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들판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가시덤불에서 홀로 시름만 뜯고 있었을 것이다

 

초저녁 하늘에서

우뚝 솟은 뿔을 보았다

 

 

너도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었구나

달무리 주위로 어둠이 쏟아지고 불끈 솟아오른 달의 뿔만 버젓이 내걸려

푸-푸우

서서히 움직인다

돌진하는 네 뿔에 받혀 내 숨소리는

가빠진다

 

門하나가 열린다

                  -⑥심인숙 <달의 角>전문

 

 

작품①은 1966년 1월 12일 중앙일보 월남현지 보도를 읽고 느낀 감정을 시화한 시조이다. 그 신문의 기사 내용은 <베트콩과 최전방에 싸우는 사병은 하루에 1불, 청룡부대 k하사는 캄란에 상륙한지 3일만에 죽었다. 군 재무관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k하사의 시체위에 3불을 올려놓고 눈물을 뿌렸다>라는 내용이었다. 삼엄한 군부 통치 속에서 이 시조는 충분히 필화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충격적인 고발시조였지만 시인은 요행히 무사했다. 이호우의 경우 그의 시조들은 그런 그의 가열한 시정신속에 전 작품들이 씌어졌다. ②의 경우도 분단조국에 대한 고통과 답답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전편에 걸친 시적 태도는 독자에게 공감과 신뢰를 아울러 줄 수 있었다.

작품③과④는 80년대 작품이다. 화장실에 붙어있는 벽보를 그대로 옮긴 듯한 ③과 ④는 실험성에 있어서도 단연 시선을 끌만한 시도였지만 산업화 혹은 근대화가 가져온 무산 서민들의 신산함을 처절하게 그려내었거나 분단 조국의 우울한 풍경을 별다른 수사 없이 리얼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단연 성공적인 화제작이었다. 아울러 이 시의 배면에 깔려있는 시정신을 독자들은 느끼면서 시대의 고통을 함께 공감하게 된다.

작품⑤는 90년대에 씌어진 것이다. 시계가 넓어진 느낌을 가지게 한다. 지구상의 빈부 차이를 지각하게 하고 인류애를 자극하기도 한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우리들이 가질 만한 시계 범위의 확대는 눈앞의 빈곤에 허겁지겁하던 우리에게 새로운 그림자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 타개를 촉구하는 어떤 압력을 느끼게도 된다.

작품⑥은 2000년대에 씌어진 시다. 주제의식이 미약하진 않지만 앞서 거론한 작품에 비해서 시인의 확고한 의식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소외와 극복의 은유로 그려진 심상풍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잘못 씌어진 것은 아니다. 충분히 건강한 시정신을 지니고 씌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상기한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가 현실을 다루거나 그렇지 않거나 실험적이거나 또 기존의 기법으로 쓰거나 관계없이 시인들은 자기 나름의 건강한 가치관 혹은 시적 태도를 가지고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시인의 시정신이 스며들어있기보다 지나치게 드러나게 되는 경우에도, 그 시기의 독자감정과 공명을 이루게 된다면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의 텍스트로 시를 다루게 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시정신은 시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시를 시답게 하고 시의 위의를 지켜주고 시를 읽는 가치를 고양시켜 준다. 그런데 최근 우리 시들이 이 중요한 시정신에서 이탈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적이 않다. 이러한 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현대시는 언어의 통제력을 잃고 무척 수다스러운 경향을 띠게 되었다. 현대시의 이런 요설화에 마치 당연한 귀결인 듯이 언어의 하락(타락)이 수반된 현상 역시 많이 볼 수 있다. 자포자기적 태도로 보이는 이런 시적 사보타주는 세계의 죄악에 대한 공법의식의 산물이거나 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시적 폭력으로 옹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또는 정보화시대)의 물량주의에 시정신이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보여주는 산물이라고 볼수 있다.”

                                -김준오「육시론및 시안론과 서구의 전시이론」중에서

 

 

“이른바 하위문화의 물결이 오늘날 우리 시를 새롭게 강타하고 있다. 성표현을 중심으로 한 과대한 노출증과 분열된 주체를 보이는 그러한 시들은 시인 자신에게 마스터베이션적인 효과는 줄 수 있을 지라도 독자의 감동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가정 파괴적 상상력과 공동체의 덕목에 대한 증오와 엽기적인 행태도 ‘야동, 훔쳐보기 수준으로서 독자를 사로잡지 못한다.”

                             -김주연 「시와 시인의 홍수 가운데서」 중에서

 

 

시의 완결성을 위해 동원되는 여러 모습들이 지나치게 과거를 반복할 경우 둔감해진 독자의 마음을 흔들 수가 없다. 비시적인 환경과 그런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읽히게 쓰고 싶다. 이러한 욕구의 과잉이 만들어내는 시들 중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시정신을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위 평론가의 주장은 그런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다. 대가급의 평론가 중 어느 한 분은 문학상 심사평을 하며 요즈음 데뷔하는 시인 중엔 가짜시인이 너무 많다고 일갈한 바 있다. 그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저급한 문예지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한국문단이 인정하는 신춘문예 및 문예지 출신 시인들의 작품들 중 대부분이 가독성이 지나치게 부족하고 시정신이 미약한 것에 대한 경고라고 알고 있다. 물론 시가 지식을 가르치고, 그 시대의 정치를 얘기하고 바른 삶의 길을 안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시는 근원적으로 우리 삶의 행복을 위해, 부패한 오늘을 개선하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도덕적 삶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여해야 한다.

러시아 작가 고리키는 “나는 시의 유파를 모른다. 단지 시에는 좋은 시와 나쁜 시, 두 가지가 있다는 것만 알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라 레이쉬엔 역시 좋은 시와 나쁜 시, 이것이 우리가 시를 쓰고 읽는 때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시란 우리가 읽고 난 뒤에 감정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정신적인 계발이 있어야 하며, 심미적인 희열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더불어 유시욱은 시란 인간의 경험에 대한 지각을 풍부하게 하고 미래행동의 진로로서 지능의 가능성을 계발해주는 수단을 제공해 주며 결과적으로 인간 지능을 증대 시키고 도덕적 습성을 강화시켜주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는데 이 또한 시정신과 거리가 있는 얘기는 아니다.

이성복의 주장에 의하면 미학과 윤리는 하나이다. 그는 시의 미학은 윤리를 담보로 하고, 시의 윤리는 미학을 지주로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도 보듯이 시는 단순한 언어유희의 문학이 아니다. 특히 동양시의 전통에서는 정신적 의미가 더 강조되어 왔다. 혹자는 그 전통이 시를 지나치게 근엄하게 하거나 경직되게 만들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 부족 때문이다. 의미나 정신이 시를 경직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어떤 정신이냐, 어떻게 표현했느냐,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를 아울러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시에서는 어떤 언어로든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풍경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풍경들의 배면에는 시정신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풍경을 제시하는 일에만 치중하여 정작 시정신을 실종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잡다한 유파가 혼재하는 시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글에서는 무엇보다도 그 점을 이 시대의 시인에게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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