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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율, 의미 이전의 원초적 세계를 소환하는 주술 등록일 2017.01.30 20:41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943

운율, 의미 이전의 원초적 세계를 소환하는 주술

                                                           

 이경철

 

 

 

   지난여름엔 비가 참 많았다. 그만하면 넘치도록 충분했는데도 뭐가 모자랐는지 내리고 또 퍼부었다. 여기저기 물난리 소식 들리는데도 끊겼다 싶으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빗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만 들으면 뭔가 떠오르는 듯했다 붙잡으려면 사라지곤 했던 그 뭔가를 이번만큼은 확연히 듣고 움켜쥐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번쩍 번쩍 번개치고 바로 머리맡에 뇌성 벼락 내리쳐도 한사코 빗소리에만 기울이고 있는 귀에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곡조가 어느 순간 찾아들어 맴돌았다. 귀에서 귀로 전해 내려온 전래민요의 곡조라기보다는 4·4조의 어조(語調)가 맴돌며 가엽고도 짠한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한동안 맴돌던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어느 순간 〈섬 집 아기〉 동요로 넘어갔다. 이번엔 7·5조 어조라기보다 예쁜 곡조(曲調)가 외로운 생각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청포장수가 울고 갔으면 어쩔 것이며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 곡조가 어떤 음색일까라는 의미의 연장선상의 생각들이 아니라 아무 뜻 없는 어조와 곡조 자체가 생각 이전의 짠한 세계를 불러오고 있었다. 내리고 또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시간과 공간도 없이 가없이 불쌍하고 짠한 세계만 어조와 곡조로 떠올리고 있었다. 의미가 되지 못해 붙잡을 수 없는 원초적 세계를.

   이같이 끊어졌다 이어지며 단속적(斷續的)으로 내리는 빗소리 같은 어조와 곡조는 의미 이전의 세계 자체를 우리에게 떠오르게 한다. 하여 볼프강 카이저는 서구의 문학론을 종합해 살피며 음향과 리듬 같은 비이성적 언어를 서정시 혹은 서정적 장르의 한 본질적 특성으로 보았을 것이다. 어조와 곡조, 시에서는 음상(音像)과 운율 등 의미 이전의 층위가 시를 의미론적 차원에서 존재론적 차원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를 자족적인 우주로서 끊임없이 반복, 순환시키는 것은 바로 시의 리듬”이라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시작 체험을 바탕으로 파스는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라고 밝혔다. 직선적인 산문과는 달리 원형적 시간을 끊임없이 반복, 재창조하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하는 것이 바로 시의 운율이라는 것이다.

   시에서 운율의 교과서적인 정의는 ‘일상적 소통의 산문이 아니라 운문의 예술로 감상하게 하는 시의 본질적 요소’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이러한 운율은 동일 음이나 글자 수, 음보, 구절, 문장의 반복이나 나열 등에 의해 형성된다고 배웠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시에서 드러나는 운율의 많은 효과 중 나는 특히 주술적 효과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가 좋은 운율의 시를 읽을 때 온몸의 감동으로 느끼면서도 뭐라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뿔뿔이 떨어진 시공과 너와 나를 아득한 한순간으로 이어주는 그 주술성 말이다.

   시에서 이같이 서정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의미 이전의, 그 ‘비이성적 언어’인 운율이 내장된 시의 장르가 정형시. 우리에게는 시조이다. 시단 전체에 끊임없이 노래로서 시의 본질, 서정의 풍격을 드높여야 하는 시조의 운율은 지금 잘 나아가고 있는가. 혹 운율이 정형률을 벗어나 자유시로 가고 있지 않은지, 판에 박혀 굳어져 정조를 오히려 퇴색시키지 않는지 둘러보며 좋은 시조 몇 편 감상해본다.

 

시조의 정형률,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노래의 큰 틀

 

양반댁 후실을 닮은 자귀꽃 만개한다
닫아도 열리는 가슴
속살 환히 내비치고
주고도
넉넉한 사랑
목덜미가 고와라

 

홀로된 누님을 닮은
자귀꽃
비 맞는다
갈가리 찢어진 가슴
앞섶에 흐르는 눈물
청춘을
톺아낸 사연
이리 가슴 아파라     

  
                                     ―홍진기 〈자귀꽃 변주〉 전문(《거울》 고요아침)

 

   홍진기 시인이 12년 만에 시집 《거울》을 펴냈다. 서문에서 홍 시인은 시조를 “서로를 잡아주는 탄력 있는 언어를 위해 허용되는 아름다운 큰 틀”이라며 “그 자유로운 화성에 매료된다”고 했다. “노래가 되는 시를 꿈꾼다”는 홍 시인은 이 시집에 꽃 등 대상에서 자신의 심사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시인과 대상이 정형률을 타고 순하게 겹쳐지며 결 고운 서정의 전범을 보여주는 시조 76편을 싣고 있다.

   능소화와 더불어 더운 여름 한 철을 대표하는 꽃이 자귀나무 꽃. 능소화가 가릴 것 없이 대담한 화려함으로 보라는 듯 내놓고 하는 사랑이라면 자귀나무 꽃은 녹색 장원 뒤에 숨은, 훅 불면 꺼질 듯한 숨어 하는 사랑이라고나 할까. 〈자귀꽃 변주〉는 그런 자귀나무 꽃에 시인의 심사를 실어 두 수로 변주하고 있다. “노래가 되는 시를 꿈꾼다”고 했기에 한 주제를 화성법 등의 변화를 주며 연주하는 ‘변주’라는 음악 용어가 제목에 붙었을 것이다.

   앞 수 초장에서 자귀꽃은 막 피어나며 “양반댁 후실” 이미지로 드러난다. 중장에서는 수실같이 가닥가닥 훤히 내비치는 꽃술의 이미지일 것이며 종장은 아래는 하얗고 점차 붉어지는 자귀꽃의 형상과 색깔의 이미지에 시인의 심경이 덧씌워진 이미지일 것이다.

   뒤 수에서 자귀꽃은 비 맞고 있는 “홀로된 누님” 이미지로 드러난다. 꽃술이 비를 맞고 있으니 중장에서는 “갈가리 찢어진 가슴/ 앞섶에 흐르는 눈물”이라는 이미지를 나열했을 것. 종장에서는 순전히 진술로만 나가며 감상과잉일 정도로 시인이 대상을 압도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시조의 눈이랄 수 있는 종장의 둘째 구 “톺아낸 사연”이 ‘사연’이란 추상 명사를 ‘톺다’라는 동사로 수식하면서 역동적 이미지를 얻고 있다. 올올이 발돋움하며 톺는 듯한 자귀꽃 꽃술과 시인의 흉중에서 끌어올린 심경이 중첩된 빼어난 이미지를 제시하며 아직도 스러질 수 없는 청춘과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 한 등 서정의 본질적 목록들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3장 6구 45자 안팎으로 꽉 짜인 틀 안에서 위 시조는 앞 수와 뒤 수에서 어떤 변주를 이뤄내고 있는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초장의 행 나눔. 앞 수는 한 행으로 처리한 데 비해 뒤 수는 세 행으로 잡아 시각적으로 변주하고 있다. 그러나 앞뒤 수 모두 초장의 전반 구는 비유에 의한 진술, 후반 구는 행위에 대한 묘사라는 동일한 문장 구조를 보여줘 이렇다 할 내재율이나 청각적 운율의 변화는 들려 주지 못하고 있다.

   중장 또한 똑같은 나열로 자귀나무 꽃의 시각적 이미지는 선명히 제시되고 있지만 청각적 운율의 변화는 주지 못하고 있다. 감탄으로 끝맺은 종장 역시 이렇다 할 변주를 이뤄내진 못하고 있다. 단 앞 수의 묘사적 감탄과 달리 뒤 수에서는 직접적 진술로 감탄하면서 자귀나무 꽃과 시인이 틈 없이 일치하고 있는 점은 눈에 띈다.

   시조는 자수율, 음보율, 3장 6구의 기승전결 식의 전개 과정 등 모두가 다 율격적 층위에서 전개되는, 자체로서 노래인 장르다. 이 율격의 각 층위, 즉 외재율적 측면뿐 아니라 시상의 전개와 이미지의 중첩과 변용에서 나오는 내재율적 측면이 서로 협력하며 혹은 갈등하며 수많은 변주를 가능케 하는 정형시가 시조이다.
   시집 《거울》에서 홍 시인은 정형의 틀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면서 변주를 꾀하려 애쓰고 있다. 한 편 한 편 따로 읽으면 전아한 운율이지만 이렇게 수십 편을 함께 엮어 한 권의 시집으로 쭉 읽어나가다 보면 단조롭고 갑갑한 느낌 지울 수 없다. 왜일까. 물론 변주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고도 넉넉한 사랑”에서와 같이 ‘뭐뭐도 뭐뭐’라는 식의, 시조에서는 이미 관행으로 굳어버린 역설적 표현법은 잘 나가던 운율의 풍격을 한순간에 식상하게 만드니 피해야 할 것이다

 

자수율, 음보율에 앞선 자연스런 운율 생성

 

간이역 몇 정거장
완행열차 같은 봄날

 

꽃 피듯
그 꽃 지듯
제 품에 녹아들어

 

속 넓은 항아리 가득 장맛으로 배어 있는     

              

밑간이 짙을수록
음식 맛은 덜하다며

 

참으로 짜지 않게
그러나 간간하게

 

말수도 웃음소리도 고명으로 얹던 당신


                                       ―신필영 〈소금 어머니〉 전문(《유심》 2011 7/8)

 

   언어예술로서 시조의 격(格)과 일상이, 정형의 속박과 자유가 자연스레, 간간하게 배어 있는 시조다. 정형을 충실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일상어법 같은 자연스러운 운율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니 반복과 나열, 그리고 허사(虛辭)로 버린 것 같은 조사와 부사에서 나오고 있다. 일상어법으로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머물게 하는 시의 격은 어디서 나오는가 했더니 앞 수 초장이다.

   “간이역 몇 정거장/ 완행열차 같은 봄날”에서 오는 듯 마는 듯, 가는 듯 머무는 듯 하는 ‘봄날’을 ‘완행열차’와 ‘간이역 정거장’에 비유하며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전반 구, 후반 구가 명사로 종결되며 단호하고 꽉 짜인 구절은 이것이 일상어법이 아닌 격을 갖춘 시 예술임을 초장부터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중장에서 봄날의 이미지는 꽃의 이미지로 넘어가고 있다. “꽃 피듯/ 그 꽃 지듯”이라며 이미지가 피고 지고로 진전되면서도 음보에서 나오는 운율보다는 반복에서 나오는 운율로 들리게 하며 초장의 음보율에 갇힌 운율에 변주를 준다. 그러면서 “제 품에 녹아들어”라며 중장의 꽃의 이미지를 종장의 항아리 이미지로 넘겨준다. 봄날이 꽃으로, 다시 꽃이 항아리 이미지로 변용돼 진전되며 내재율을 낳고 있다.

   뒤 수에서는 장맛 배어 있는 속 넓은 항아리가 “당신”이라는 “소금 어머니”로 변용되며 매 장이 그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반복 나열되며 아주 자연스러운 운율을 얻고 있다. 특히 중장 “참으로 짜지 않게/ 그러나 간간하게”에서는 ‘~게’라는 어미가 반복되며, 또 “참으로”라는 부사와 “그러나”라는 조사가 별다른 뜻 없이 짝을 이뤄 반복효과를 주며 자연스러운 운율을 낳고 있다. 자수율과 음보율로 꽉 막힌 시조에서 이런 허사나 의성어, 의태어 등의 조심스럽고 절제된 사용은 관형적 보법의 숨통을 확 터주는 구실을 한다.

   딱히 짜디짠 시의 핵은 맛보기 힘들고 고명만 보일지라도 이런 자연스러운 운율의 운용으로 인해 넉넉하고 포근하게 읊조려지는 시조이다.

 

변주의 자유 만끽하되 정형률은 지켜야 시조

 

흔들리는 것이 사뭇
밥이고 그리움이고

 

얼굴이고 춤이고
노래이고 외침이다

 

말없이 흔들리는 것
은빛 마침표이다.

 

하늘 온통 휘젓다가
울컥 내려앉은 가을

 

가만 흔들리는 것
눈물이고 결별이다

 

억새여, 네 이부자리
별빛 먼 무덤자리.


                                ―이정환 〈명성산 억새〉 전문(《시조시학》 2011 여름)

 

   가을 갈대 풍광 중 으뜸버금 간다는 포천 명성산 갈대밭에 나도 오른 적이 있다. 이 시와 같이 산마루를 허옇게 덮고 있는 갈대꽃들이 흔들리며 하늘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랑이고 이별이고 애달픔이고 그리움을 온몸으로 일렁이게 하던 그때 명성산 가을 갈대꽃 풍광을 잘 드러내고 있는 두 수로 이뤄진 시조이다.

   그런 갈대의 흔들림같이 위 시조는 정형을 최대한 지키려 하면서도 또 그 율격을 온몸으로 최대한 변주해내고 있다. 운율상 위 시조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조의 정형률이어서 편안한 3·4나 4·4 자수율 대신 2·5나 2·6 자수율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음절을 셋이나 네 음절의 한 음보로 읽어내려면 숨이 느려지고 반대로 다섯이나 여섯 음절을 한 음보로 읽어내려면 호흡이 사뭇 가빠진다. 운율 형성의 가장 기초 단위인 자수율에서부터 변형을 꾀해 숨 가쁘게 몰고 가며 천지간에 가쁘게 흔들리는 갈대의 이미지를 운율로도 잡아내려는 의도일까. 앞뒤 수 초장에서부터 6·2 혹은 거꾸로 변주하여 2·6의 자수율을 취하며 가쁘고 격한 운율로 출발하고 있다.

   특히 앞 수 초장, 중장에서 연 나눔에서는 장을 나누고 있지만 문장 구조나 운율상으로는 장 나눔도 없애버리는 파격을 취하고 있다. “흔들리는 것이 사뭇”이라며 초장 전반 구에서는 긴장된 운율을 제시하고 나서는 초장 후반 구와 중장 전체에서는 ‘~이고’라는 어미의 나열과 반복으로 이어가고 있다. 여섯 번이나 이어지는 이 반복 또한 시조의 음보율과는 전혀 별개로 보이는 숨 가쁜 리듬을 형성하며 군락을 이루고 흔들리는 갈대 낱낱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갈대의 이미지와 시인의 정감의 고조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주는 참신한 운율이지만 과연 시조의 음보율을 지키고 있는가 한번 찬찬히 들여다볼 일이다. 시조의 음보율은 한 장이 전, 후 구로 나뉘고 각 구는 두 음보로 나뉜 총 6구, 12음보에서 나온다. 한 음보는, 쉽게 말해 한 단어나 그 단어에 조사나 어미 등이 붙은 띄어쓰기 단위로, 대개 2음절에서 5음절까지이며 해서 시조에서는 그 평균치이면서 우리말에 보편적인 3, 4음절이 한 음보로 자연스레 정착됐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초장 전반 구 “흔들리는 것이 사뭇”이라는 이 6·2조는 두 음보로 읽어야 할까, 세 음보로 읊어야 할까. “사뭇”이라는 부사로 긴장되게 마감된 음보여서 “흔들리는 것이”도 붙여서 한 음보로 숨 가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속도감 있고 긴장된 운율의 효과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뒤 수 초장 전반도 “하늘/ 온통 휘젓다가” 식으로 두 음보로 읊어지는가. 그러기에는 “하늘”이라는 명사의 음의 장단이 너무 짧고 “온통”이라는 부사의 장단은 길다. 해서 “온통”이라는 두 음절 뒤에는 잠시 휴지를 둔 다음 “휘젓다가”로 이어지는 3음보로 읊을 수밖에 없다. “휘젓다가”의 4음절에서 “가”를 빼고 3음절로 만든다면 ‘온통 휘젓다’는 5음절 한 음보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뒤 수 초장 후반 구는 같은 2·6조이면서도 두 음보로 읊조려진다. “울컥”이라는 부사 뒤에 쉼표는 없지만 마치 쉼표가 있는 듯 길게 끊으며 읊어져 뒤에 여섯 음절을 거느릴 숨을 비축해뒀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서정적 경과에 따라 정조가 고조되며 시인과 같은 호흡으로 장단이 맞춰져 읊조려지는 게 운율 아니던가.

   그렇게 정조를 더하며 위 시를 다시 읊어 보시라. 같은 두 음절이면서 “은빛”이나 “하늘”같이 짧게 읽히는 음보가 있고 “사뭇”이나 “울컥” “가만” 등은 휴지부를 거느리고 길게 읊조려지지 않는가. 마지막 행 종장 후반 구 “별빛 먼 무덤자리”에서 “먼”은 문맥상 앞뒤 어느 곳에도 붙일 수는 없고, 또 한 음절이면서도 “별빛”이나 “무덤자리”만큼 길게 읽혀 독립된 한 음보로 읊조려 줘야 시의 맛과 깊이를 더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정환 시인은 거북 등껍질같이 굳어진 시조의 관행적 보법(步法)에서 벗어나 참신한 운율을 얻으려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시인이다. 해서 자유시같이 자유롭게 시상을 전개하면서도 시조의 운율을 드러내며 시조의 현대화된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아, 그러나 등껍질 사이를 뚫고 나온 운율의 참신성을 위해 정형률을 벗어나지 않았는지, 살아 있는 운율과 시조의 정형 양쪽을 지키기 위해 거꾸로 초보처럼 자수율을 꿰맞추는 고육책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둘러볼 일이다.

 

시조의 모든 층위에서 울려 나와 다채로운 정형률

 

왕은 죽어서
젖무덤만 남아서

 

남풍 부는 아침이면
약속처럼 젖이 돌아

 

꽃다지
떼로 몰려와
우· 우· 우·우 기어오르네

 
                              ―박명숙 〈봄날―진평〉 전문 (《은빛 소나기》 책만드는집)

 

   산수유 꽃이 노랗게 멍울 지던 이른 봄날 경주 왕릉 지대를 둘러봤었다. 여인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목백일홍 나무줄기와 가지에 겨우내 쌓인 때를 하얀 수건으로 닦고들 있었다. 그렇잖아도 매끄러운 목백일홍 수피가 여인의 살결처럼 윤이 나며 살아 오르는 듯했다. 저 나무에 꽃이 만개하면 둥그런 젖무덤에 묻힌 왕들도 꽃다지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환생의 환상에 잠긴 때가 있었다.

박명숙 시인이 등단 후 18년 만에 펴낸 처녀 시집 《은빛 소나기》를 읽다 위 시에 이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뭔가 얻어 표현하려 했으나 한 구절도 못 얻은 그때 그 심상을 이렇게 간단없이 술술 풀어내다니. 18년간 갈고 닦은 자중자애(自重自愛)가 이런 절창을 얻었을 것이다.

   모든 층위에서 시조의 정형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도 전혀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내용과 형식, 운율과 이미지가 빈틈없이 일치하며 기승전결의 시적 경과를 아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고 있다.
   초장부터 전반과 후반 구 어미 ‘~서’를 반복하며 음보율보다는 반복법에 의해 운율이 나오게 하고 있다. 초장부터 대뜸 반복법을 취해서인지 중장은 자수율과 음보율에서 리듬이 생성되는데도 마치 반복법에 의해 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초장과 중장은 이렇게 반복과 나열에 의해 운율과 이미지를 일으켜 세워 전개하면서 운율에 미세한 변주를 하고 있다. 초장의 2·3조에서 4·3조로, 중장에서는 4·4·4·4조로 나가며 절정을 향하는 점층법, 음악의 크레셴도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다 종장 초반 구에서 시상이 전환되며 초, 중장에서 나열되던 “왕”과 “젖무덤”과 “남풍”과 “아침”과 “약속”과 “젖”이 “떼로 몰려와” “꽃다지”라는 이미지로 집적된다. 초, 중장에서 자연스레 반복되며 나열돼 “꽃다지”로 수렴되고 있는 시어들의 이미지와   상징의 원형을 보라. 죽음에서 소생으로 나아가도록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들 아닌가.

   ‘시조의 눈’이라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종장 둘째 음보 “떼로 몰려와”를 보라. 얼마나 역동적으로 삼라만상을 한통속, 꽃다지로 살려내고 있는가. 이어지는 셋째 음보 “우· 우· 우·우”라는 의성어로 시인은 앞 음보의 역동성을 한 번 더 실감 나게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의성어 자체의 음상(音像)으로 인해 종장을 시각적 이미지에 청각적 이미지를 덧보탠 공감각 이미지로 바꾸며 이미지와 운율이 온몸을 살갑게 감싸고 돌게 하고 있다.

   만약 이 의성어 대신 4음절의 다른 음보를 취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종장 앞 구의 역동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판에 박힌 식상한 음보율로 흘러 감동은 반감됐을 것이다. 시조는 이렇듯, 홍진기 시인이 말한 대로 “서로를 잡아주는 탄력 있는 언어를 위해 허용되는 아름다운 큰 틀”이다. 모든 층위의 틀을 지키면서 위 〈봄날―진평〉같이 짧은 단수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레 변주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정형률. 그 율(律)의 법은 지키라고 정해진 것이지 어긋나면 그 범주의 족속들이 이미 아닐 것을.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발췌 《유심》2011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