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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주 4.3과 시조문학<김동윤> 등록일 2017.02.01 16:03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1019

제주 4.3과 시조문학

 

김동윤(문학평론가, 제주대 교수)

 

1. 들머리

잘 알려졌다시피 제주4.3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다. 아니 공산폭동론으로만 말할 수 있던 시절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 난공불락 같던 벽은 문학을 통해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4.3이 진행 중이던 때부터 간간이 발표되던 4.3문학은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1978)을 계기로 왜곡된 4.3의 벽을 무너뜨리는, 4.3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였다.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을 채택한 데 이어,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등의 일련의 성과는 4.3문학이 일궈낸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4.3문학에서 시조분양의 위상은 어떨까? 4.3시의 한 부분으로 4.3시조가 검토되긴 했어도, 아직까지 이런 문제가 따로 논의된 적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거칠게나마 4.3시조의 전개 양상을 개괄하고 주요 작품을 살표보는 것도 현재의 시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 4.3시조의 전개

 최근 제주 출신으로 쓴 최초의 현대시조가 1922년 간행된 [신생활] 제7호에서 확인되었다.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1891-1943)이 손병희(孫秉熙)의 별세에 즈음하여 조시(弔詩)로 쓴 작품이 그것이다. 4음보격 3장 3연의 연시조인 김명식의 작품은 아직 최남선을 중심으로 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20년대 초반에 발표된 시조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제주 시조문단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70년대 이후에 형성되었다. 정인수가 1974년 [한국문학]신인상에 당선되고 1976년에 이용상이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1980년데에는 오승철, 김공천, 정태무, 이인식, 오영호, 고성기, 고응삼, 고정국, 문태길 등이 등단하면서 제주 시조문단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1984년 제주시조문학회가 창립(초대회장 정태무)된 데 이어, 1989년 제주시조문학회의 기관지인 [제주시조]도 창간되면서 제주 시조문단은 발전의 저변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제주시조의역사는 길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시조작가들의 활동이 뒤늦게 이뤄지면서 4.3의 시조화 작업도 비교적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4.3문학은 '비본질적, 추상적 형상화 단계'(1948-1978), '비극성 드러내기 단계'(1978-1987), '본격적 대항담론의 단계'(1987-1999), '전환기적 모색과 다양한 담론의 단계'(2000-)등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는바, 4.3시조는 6월 항쟁 이후 전개된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개인 시집으로 엮인 경우를 중심으로 보면, 오승철의 [개닦이](1988)가 1980년대에서 유일하며, 1990년대 10권, 2000년 이후 22권으로 점점 늘어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인 '전환기의 모색과 다양한 담론의 단계'에서는 시조 분양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4.3문학에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의 '본격적 대항담론의 단계'에서도 오승철, 오영호, 고정국, 고성기, 문태길, 김영흥, 신승행, 홍성운 등의 4.3시조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2000년대 들어 다양하고 본격적인 작품들이 발표되었다는 말이다. 오승철, 오영호, 고정국 등 중견 작가들의 작품이 더욱 묵직해지는 가운데 강상돈, 이애자, 김윤숙, 문순자, 장영춘, 한희정, 홍경희, 고춘옥 등 신인 작가들은 새롭고 구체적인 감각의 작품을 생산해내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3. 4.3시조의 몇 가지 양상

 앞에서 살핀 대로 4.3시조가 실린 시집이 33권이니 개별 작품들은 적어도 200편은 될 것으로 보인다.(기회가 되면 4.3시조 전집 혹은 선집을 간행하였으면 한다.) 그러니 이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오승철, 오영호, 고정국 등 세 시인의 작품을 간략히 살피는 것으로 4.3시조의 양상에 대한 점검을 갈음하고자 한다. 이들 세 시인은 초창기부터 꾸준히 4.3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4.3시조문학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오승철은 1957년생이다. 그러니 그는 4.3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 그의 4.3시조는 고향마을에서 벌어진 사태의 추체험 상황에서부터 시작되낟. 그는 첫 시집 [개닦이]에서 "하찮은 천둥소리에도 공포에 질려 온몸으로 우는 제주의 장끼는 필시<4.3사건>의 총성에 놀란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언급을 하고 있을 정도로 4.3의 숙명적인 의미를 짚어낸다. "푸드득 장끼가 날더라/ 산을 비워두더라.// 망 앞을 몰래 넘어온 총성에 몰라 콩밭으로 콩밭으로 숨어 살다가 마침내는 초집들도 불타고 아우성 속에 잡혀가던 아버지, 아버지, 서슬 푸른 죽창에 놀라 천둥소리에도 소스라치던 장끼야. // 어머님 그 콩밭의 울음으로 처절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중장에서 4.3의 갖가지 사연들이 열거됨으로써 사설시조 양식이 적절히 활용된 작품임은 물론이다.

 두번째 시집 [누구라 종일 홀리나]에서 오승철의 4.3 인식은 고향마을을 벗어나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강한 어조로 표출된다. " 다랑쉬, 이삿날 슬쩍 내다버린 저 놋화로/ 불 한번 토해놓고 잠시 쉬는 분화구여/ 화산탄 날아간 자리 증언하라, 꽃향유// 증언하라, 그 자리 오로 숨던 다랑쉬동굴/ 소개령 끝난 반세기 댓잎들은 돌아와도/ 4.3의 '4'자도 금했던 역사는 갇혀있다([다랑쉬오름])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장소성의 확장과 더불어 묻혀진 진상의 올바른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아, 섬과 섬 사이 저 오름과 오름 사이/ 대명천지 이 봄날 누가 나를 격발하라/ 삘기꽃 낭자한 터에 / 소리라도 굴리고 싶다" ([송당 쇠똥구리2])라든가 " 해묵은 자리젓 냄새' 반쯤 고린 4.3으땅 / 나도 이런 날엔 종소리로 날아들어/ 반세기 잠 못 든 불빛 온몸으로 치고 싶다"([송당 쇠똥구리5])에서 보면, 더욱 격정적으로 진실을 향한 몸부림을 하는 시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처럼 오승철의 시조에서는 새, 오름, 동굴, 들꽃 등 제주의 자연에 의탁하여 역사의 깊은 상흔을 노래하는 가운데 진실의 온전한 회복을 온몸으로 꿈꾸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영호는 1945년 제주읍 연화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을 4.3의 회오리바람속에서 보냈다."

 성담 속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4.3은 어느 정도 실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풀잎만한 이유]에 수록된 [연화촌 사설]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갈 길 없는 목숨들', ' 다시 마을로', '포성은 멈췄어도'등의 소제목 아래 모두 21연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이 겪는 4.3의 수난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몇 집을 동여 묶어/ 눈보라 몰아치는 검은오름 넘을 때는 / 젖먹이 울부짖는 소리 초목들도 우는데.// 얼어 죽은 목숨들과 굶어죽은 목숨들이/ 하늘 훨훨 날아올라 눈발로 내려치고// 쌓인 눈 밟으며 가는 산자들의 발자국.// 칡뿌리 파다보면 손톱에 피가 돌고/ 부풀어진 터진 발창 어미 손에 감싸봐도/ 목숩은 가시줄처럼 찢기우고 끊기고"에서처럼 피난생활을 그리는 데 이어, 마을로 돌아가서 성 쌓고 살다고 무장대의 습격으로 전투가 벌어진 상황이 떠올려지고, 사태 후에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던 소년시절의 어두운 추억이 서사시처럼 형상화되었다.

 오영호에서 4.3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제주섬 곳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이 모두 4.3의 사연과 연결된다. 예컨대 "종달이 울음소리/ 들판을 쏘아댄다./ 부시시 눈을 뜨는 / 제비꽃 한두 송이/ 눈 비빈 버들강아지 / 봄햇살의 속삭임// 소문난 상처들이/ 청사초로 피어나고/ 그 향기 들을 건너/ 솔숲을 흔들어도/ 끝끝내 칡넝쿨처럼/ 풀지 못한 사연들.// 도린곁 이드거니/ 잠자리피 돋아난다/ 군화의 자국마다/들풀들은 쓰러져도/ 4.3에 가신님 제삿날/ 눈물 흘린 저 고사리"([들꽃들의 노래])식으로 그는 언제 어디서나 4.3을 만난다. [억새꽃 너를 보면], [고사리], [곶자왈에서 길을 잃다], [관음사 까마귀]등이 모두 그런 작품들이다. 그러기에 그는 4.3에 관한 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삼촌, 어디로 감수광?'하는 제주사람의 인사말도 "4.3에 가버린 우리 형님주검도 못찾고요, 6.25사변에 행방불명된 철갑이 삼촌도 이북에 생존해 있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는 없는데요.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던" ([참, 이상한 인사말]), 4.3의 상황과 연결시키고, 항구 주변을 서성이다가도 " 그해 흰나비처럼/ 날아온 삐라 속엔/ 귀순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선무공작/ 줄줄이 끌려 들어온 주정공장 고구마 창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하고 착한 사람들/ 산에 있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포로가 된/ 총탄에 죄명도 모른 채 쓰러진 목숨들/ 죽다 남은 몇 몇 사람 재판받게 해준다고 / 화물선에 짐짝 싣듯 싣고 대전, 서대문형무소로 / 끌려간 아버지 형님 삼촌 돌아오지 못하고./ 오늘은 사라봉 등대 밑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한 맺힌 가슴팍을 수천 번 쓰다듬어도// 동백꽃 붉은 울음만/ 파도처럼 밀려올 뿐"([주정공장 소고])이라며 수많은 죽음을 떠올린다. 4.3의 실체험,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아픈 가족사의 상흔은 이처럼 오영호에게 자꾸만 기구한 사설을 풀어놓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47년생인 고정국 시인은 첫돌을 전후하여 4.3을 겪었다. [지만 울단 장쿨래기]에서 그는 부모와 고모, 누나, 동네 형님 등에게 전해들은 사연들을 제주어로 재현한다. "산더레/ 도르카/ 바당더레/ 도르카"(저 멀리 따발총 소리0 하던 그 와중에 많은 희생이 있었다. 밭 갈다가 동백나무 숲에 숨어 목숨을 보전했던 부모, 불타 죽은 가축들, 누이 등에 업혀 숨어다니던 일, 고모부의 비참한 죽음과 고모의 눈물, 극한적인 굶주림의 실상, 만봉이 형님의 죽음, 성을 쌓고 보초 서느라고 고생하던 일 등 갖가지 참상들이 젖먹이 고정국을 맞았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4.3의 아픔을 동백꽃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돔박고장/ 눈 우이 지민/ 소태 구신덜/ 튼내지"(외갓댁)게 된다며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에서 사태 때의 선혈을 감지케 하는가 하면, "호썰 허면/ 추물락추물락"(강 건너 불보던 사람들) 놀라는 사람들의 맺힌 슬픔은 동백꽃으로 피었다진다. "돔박꽃/헤카진 질에/ 피가 벌겅/ 헹 있국"(붉은 길), "버둑이/ 돔박낭털두/ 눈 벌겅케/ 오는 모을"(동백꽃 피더란다), "털어졍/ 사름만 바레는/ 돔박고장/어쩌리"(사람도 임종 때면) 식으로, 동백꽃으로 표출되는 4.3의 상처들은 반백년 넘도록 이어진다. 그러기에 시조집의 말미에서 "촘국 촘국/ 촘단 버선/ 머리 풀엉/ 직산한 세월// 소태에/ 불카단 하늘이/ 정두 저영/ 곱느녜"(위미리 하늘빛은)라며 회한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게 오늘 보이는 고운 하늘은 하늘빛 그대로가 아니다. 사태에 불타던 하늘의 색깔이 오래도록 가슴속에 간직되었음이다. 그것은 제주섬 사람들 모두의 원체험이라고 할 것이다. 이 시조집은 단순히 향토색을 드러내는 매개체로만 제주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정체성의 회복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주어의 진정한 면모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와 현실의 참모습을 찾는 작업임을 고정국 시인은 입증하였다.

 고정국의 작품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적인 면모는 4.3의 항쟁적 의미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첫 시집 [진눈깨비]에서부터 그는 "아직도 이산 어드메/ 핏자욱이 남았을 듯// 우 우 우 산울음이 / 낙일 속에 잠겨오면// 마지막/ 빨치산 홀로/ 고엽 밟고 가는 소리"(수악의 추정)이라며 한라산 계곡의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2000년대 들어서도 "숨죽여 오십이 년/ 노루 뿔 돋은 산이// 피 흘리며 계곡을 건너간/ 초식동물을 찾고 있다// 마지막 절름발이의/ 빨치산을 / 부르고/ 있다"(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5-노루)에서 다시금 한라산 무장대를 불러낸다. 그러기에 그는 다랑쉬굴 사건에서 유골을 서둘러 뿌려버린 일에 대해서도 "바다는/ 피묻은 씨앗을/ 거부하지 않았다//서둘러/ 풍장 치르던/ 사월 그 / 폭풍의 섬// 밤마다/ 민들레 마을/ 혼불이, / 혼불이/ 춥다"(제주민들레3) 며 그런 행위가 결코 좌시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는 한편, [사월의 힘]에서는 "어둠이 깊었던 만큼/ 네 후손은 행복하리라//그 후손의 후손들까지/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한 // 음지 쪽 청미래덩굴의 // 붉은 역모를/ 다시금/ 보네"라며 '붉은 역모'까지 언급하면서 4.3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말하자면 고정국은 4.3을 통해 자주독립의 가치와 제주인의 항쟁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마무리

 이상에서 세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4.3시조의 양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들 작품에서의 4.3은 심시치 않게 나타나는 4.3의 상투적 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 관념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거니와, 깊은 성찰 속의 진중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4.3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는지 간접적으로 추체험했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절절한 가슴으로 썼으며, 온몸으로 쓴 작품이기에 감동을 준다. 그래서 이들 작품들은 일부 고시조에서 비롯된 오해, 즉 음풍농월과 유유자적이 시조의 본질이 아님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현대시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4.3시조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물론 다른 시인들의 시조 가운데서도 좋은 작품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논의하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신인에 속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깊이 있는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새롭고 구체적인 감각을 동원하여 4.3을 형상화한 경우를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런 작품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도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조계의 노령화 현상이다. 문학사회의 공통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시조 분야는 노령화 현상이 더욱 심한 것 같다. 이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해야만 4.3시조의 의미도 계승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