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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평]밭담 너머 보이는 저기 저 과녁들-조한일 등록일 2017.08.05 15:37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786

 

밭담 너머 보이는 저기 저 과녁들

 

- 오영호 시조집,『귤나무와 막걸리』(정은출판, 2016)

조 한 일

 

 

 

연담 蓮潭 오영호 시인이 『풀잎만한 이유』(1993년), 『화산도 오름에 오르다』(2005

 

년), 『올레길 연가』(2012년)에 이어 작년 늦가을, 네 번째 시조집 『귤나무와 막걸리』

 

를 세상에 내놓았다. 1986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7년 만에 첫 시조집을 상재

 

했고 해가 가면 갈수록 새로운 작품집 발표 시기가 점점 빨라진다. 그만큼 오영호 시인

 

의 시조를 향한 어느 누구 못지않은 애착이 그로 하여금 자꾸만 시조나무에 열매를 맺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세월 교편을 잡다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오영호 시인의 작

 

품들을 읽어 보면 은근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아픈 향기가 배어 있어 울컥하게 하곤 한

 

다. 그가 벗하는 귤나무와 같이 욕심 없이 전정하고 비료 주듯 한 사발의 막걸리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쟁여둔 시조집 『귤나무와 막걸리』를 여러 날 들여다보았다.

 

 

 

1. 흔들릴 때 있어도 해바라기처럼 살기

 

 

 

시름시름 앓고 있는 귤나무 한 그루

 

그래도 십년 넘게 아끼며 살아왔는데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강전정을 하였네

 

봄 되니 새싹 돋아 살아나나 했더니

 

또 다시 시들시들 늘어지는 이파리들

 

때 지난 막걸리 세 병 펑펑 쏟아 부었네

 

얼마쯤 지났을까 이파리에 윤이 돌고

 

5월엔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워 놓더니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향기 품어 가라하네

 

 

 

- 「귤나무와 막걸리」 전문

 

 

 

늦은 것에 대해 절망한 적이 있는가? 그로 인해 두려워 주저앉아 본 적이 있는가? 때가

 

이미 지났다는 것은 아마도 나와 벼랑을 마주하고 선 그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것은 절망도, 두려움도 아닌 기적처럼 누군가의 또 다른 이른 시간일지 모르도록 느껴지

 

게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다. 누군들 시름시름 앓아본 적 없겠느냐마는 누군

 

들 죽도록 아끼며 사는 사람 없겠느냐마는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향기 품어 가라하네” 처

 

럼 시간이 흐르다가 강물인 듯 흐르다가 우리 모두 늙어 갈 때 쯤 “펑펑” 울며 미치도록

 

투명한 눈물로 나를 둘러싼 이들이 무수하게 많은 꽃을 피우도록 수분 가득한 나날들이

 

었으면 좋겠다. 시인의 귤 농장, 연담별서 蓮潭別墅에 가면 귤나무들이 어떤 놈은 초장

 

같이 나를 끌어당기며 반기기도하고 어떤 놈은 중장처럼 오히려 내게 걸어오는 것 같기

 

도 하고 어떤 놈은 종장처럼 절정의 자태를 뽐내며 내 콧등에 은근한 향기를 떨어뜨리기

 

도 한다. 귤나무와 막걸리는 차가움을 견디어 끝내는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는 점에

 

서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시인은 이것을 5월의 기적으로 승화시켜 멀어지는 것이, 과거

 

가 되는 것이 오늘날 “시름시름” 대는, 우리가 수없이 어루만지고 또 감싸야 할 무수한

 

우리 젊은 세대가 향기를 품을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별수 없다고 장전

 

정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봄에는 꽃으로 피어야 한다. 반드시 저 외진 곳의 한 청춘일

 

지라도 봄에는 꽃으로 피어야 한다. 그리고 5월엔 새로운 세상이 와야 한다.

 

 

 

 

끝자락 가을 길에 잘 여문 씨앗들이

 

촘촘히 박힌 얼굴 푹 숙인 너를 보면

 

나 또한 뻣뻣했던 고개

 

숙일 수밖에 없구나

 

 

이제는 거두어들일 것 하나 없는 나의 빈들

 

때때로 수작을 거는 바람의 손을 잡고

 

받쳐선 바지랑대처럼

 

흔들리며 서 있다

 

 

 

- 「해바라기」전문

 

 

 

늦가을, 시인이 흔들리나 보다. 시인으로 살아가며 거둬들인 수많은 작품이 시인의 가슴

 

도 촘촘히 박혀 있으리라. 그렇다, 차라리 시인은 ‘시조바라기’ 였으리라. 그 뜨거운 태

 

양보다 더 뜨거운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왔으리라. 기다림이라고 했다. 해바라기의 꽃말

 

이....., 우리는 하나같이 빈들 하나쯤 심장 한구석에 숨겨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다.

 

안 그러면 왜 이리도 바람이 부는 날이 많고 쓸쓸한 날이 많고 허전한 날이 많을까? 무엇

 

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바라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피치 못한

 

나날이 계속되어도 그리고 괜스레 힘든 나날이 계속되어서 고개를 푹 숙여있어도 늘 그

 

자리에 그것이 있음에 행복한 것이다. “바지랑대처럼 흔들리며 서 있다”에서 보듯 해바

 

라기와 같은 시인도 그렇고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이 흔들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바람

 

거센 이 땅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거기가 빈들이자 또 언젠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

 

어야 할 우리가 딛고 서서 끝내는 흔들리지 말아야 할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쌀쌀한 겨울 저녁 썰렁한 오두막집

 

솔가지 활활 타며 슬며시 던지는 말

 

움츠려 살지 말라고

 

기죽지 말고 살라고

 

 

 

 

- 「난로 앞에서」전문

 

 

 

시인은 솔가지 타는 소리에 바짝 귀 기울여 능변도 아니고 어쩌면 어눌할지 모르는 그

 

불에 타오르는 말들을 연기 속에도 한 땀 한 땀 기워내며 우리의 여백에 펼쳐 놓은 듯하

 

다. “움츠려 살지 말라고// 기죽지 말고 살라고”, 춥기만 한 이 계절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이의 여백을 충만하게 하고 냉정한 이 공간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또 하루를 그저 삼키는 이의 여백을 뜨겁게 지펴준다. 솔가지는 어디쯤에

 

서 있는 소나무에 달려 있었을까? 바닷바람 매서운 차귀도가 보이는 바닷가의 야윈 소나

 

무에 달려 있었을까? 아니면 애월 올레길 한적한 곳에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에 달려 있

 

었을까? 한 번도 “활활” 타 본 적 없는 그대와 나, 아니 저 벤치 위의 노숙자마저도 까짓

 

것 어깨 한 번 펴보는 거다. 기 한 번 펴보는 거다. 그리고 난 너에게 넌 나에게 귓속말로

 

라도 전해보자. 내 앞에 서 있으라고, 그러면 나도 네 앞에 서 있을게, 어서 일어나 내 앞

 

에 서 있으라고, 그래 꼭 나도 네 앞에 서 있을게. 그리고 그 푸르던 소나무처럼 겨울 저

 

녁을 무시로 지켜나가자고.......,

  

  

 

  

 

2. 차라리 화살보다 과녁이 되어 살기

 

 

 

침묵만 하지 말고 말 한번 해보라고

 

파도는 갯바위를 여리게 때론 강하게

 

쉼 없이 때리는 짓을 오늘도 하고 있다

 

 

소금기 베인 바람 별도봉 감아 돌아

 

훔쳐 본 진지동굴 4·3의 진실 앞에

 

억새는 그저 흔들릴 뿐 한마디 말이 없다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재선충에 말라 죽은 뼈만 남은 솔가지에

 

불청객 까치들만 앉아 쑥덕공론 한창이다

 

 

보림사 범종소리 은은한 이른 아침

 

머리띠 두른 장끼 방하착放下着을 외쳐대며

 

쪼르르 장수로 가로질러 풀숲으로 사라진다

 

 

 

- 「별도봉 韻운」전문

 

 

 

시인은 파도가 갯바위에게 말 좀 하라고 다그치는 모습을 매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별도봉으로 국궁을 하러 가는 길에 파도가 기어코 바다에 사는 갯바위를 흔들어대는 모

 

습에서 화살이 과녁을 맞혀도 과녁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분명 연상했으리라.

 

파도는 화살이고 갯바위는 과녁이다. 일방적으로 갯바위나 과녁은 수도 없이 많은 타격

 

을 당해도 어차피 갯바위가 파도를 때릴 수는 과녁이 화살을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하

 

지만 화살을 부러뜨릴 수는 있는 일이다. 시위를 당기는 그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억새도 그해, 그 날의 억새는 아니지만 4·3 진지동굴을 바라보는 억새는 소리를 내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사라진 마을 곤을동은 별도봉 아래 집터만 남아있는데 무자년 그 해

 

그 억새는 소금기 밴 입을 열었으리라. 분명히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오장육부 찢기

 

는 심정으로 말을 하다 말을 이어가다 말문이 막혔으리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에 말

 

문이 막힌 사람들의 입을 권력자는 아예 봉해버렸으리라. 하지만 진실은 인양되는 법이

 

다.

 

 

재선충이 때 아닌 단풍처럼 제주의 산야를 휩쓸고 가고 아직 그 위세가 멈춰지지 않는

 

이 마른 솔 비린내 나는 시국에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뼈만 남은 솔가

 

지”에 앉아 “쑥덕공론” 하는 이들, 그 누구인가?

 

 

 

 

초등학교

 

2층 3학년 교실

 

쉬는 시간이었지

 

한 아이 ‘저기 불났져’ ᄒᆞ는 소리에

 

창가로 와르르 몰려든 아이들

 

그 때 ‘잘 탄다 잘 탄다’ 하며

 

놉뜨는 아이가 있어신디

 

집에 가 보난 지네 집이 타 부런

 

 

그 아일

 

언제부턴가

 

낮도깨비엔 불렀저

 

 

 

 

- 「낮도깨비」전문

 

 

 

‘저기 불났져’, ‘잘 탄다 잘 탄다’ 하는 소리가 점심 식사하러 간 구내식당에서도, 퇴근 시

 

간 어느 선술집에서도, 노인정에도, 대학 캠퍼스에서도, 버스터미널에서도, 경매가 이루

 

어지는 부두에서도, 관광객 드나드는 공항에서도 들렸다. 아니, 아직도 들린다. ‘놉뜨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놉뜬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집에 가 보난 지네’ 집 파란기와가 다 타

 

버린 것도 모르고 그 집 주인이 원래 주인이 아니란 것도 모르고 집이 다 타버렸는데도

 

동네에서 잘 나가는 가게에서 돈 뜯어내 사들인 승마용 말이 불타서 죽은 게 억울하고

 

말 한마디에 들어간 서울 명문대 졸업장이 다 타 버린 게 억울 할 뿐이다. 불난 집에 불구

 

경하듯 내버려 둔 아이들. 하지만 그 주인을 가엾게 여기는 그 주인의 아버지에게서 신

 

세를 졌다는 일부 사람들이 낮도깨비일지도 모르겠다. 그전에도 골목대장이 놉뜨고 그

 

똘마니들이 그를 따랐지만 민중들이 쉬는 시간에 군홧발로 그들을 짓밟던 29만 원 밖에

 

없는 이가, 포토라인에 서서 29글자밖에 말 못하는 이가 또 낮도깨비일 것이다.

 

 

 

    

 

3. 마침내 새처럼 날아보기

 

 

 

한순간

 

벼랑 끝에

 

앉아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누구인가

 

수 없는 질문 끝에

 

 

쌓인 업業

 

훌훌 다 털고

 

날고 싶다

 

새처럼

 

 

 

- 「새처럼」전문

 

 

 

날아가는 새는 자신의 날갯죽지가 벼랑인 것을 모른다. 끊임없이 흔들어야만 활짝 펴야

 

만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늘 벼랑을 어깨에 달고 살아간다. 시인은

 

심신이 벼랑 끝에 가본 적이 있음을, 그 고비를 넘고 넘기며 자아를 찾는 여행을 꿈속에

 

서도 하고 작품을 쓰면서도 그 속에서 또 길을 가고 연담별서가 있는 밭에서 귤나무 전

 

정을 할 때도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중간쯤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며 뒷걸음치다 뒤돌아

 

본 그곳이 벼랑이었을 때 한 걸음만 더 디디면 그 밑이 천 길 낭떠러지일 때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먹고 사는 일이 그렇고,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실패 했을 때

 

가 그렇고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렸을 때가 그렇고 자꾸만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바

 

람이 바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그렇고 꽃향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 내 몸이 내 몸같

 

이 여겨지지 않을 때가 그렇고 내일이 내일처럼 생각되지 않을 때가 그러하리라. 이런

 

벼랑들 앞에서 시인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택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사실은 새마

 

저 벼랑을 짊어지고 창공을 날아가지만 그것마저도 “쌓인 업業”을 “훌훌 다 털고” 날 수

 

있다면 새가 되어 날고 싶은 시인의 깃털 하나쯤 툭, 내 몸에도 떨어지면 좋으리라.

 

 

 

 

무심코 길을 가다 갑자기 도지는 병

 

뭔가 깨부숴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힘껏 찬 빈 깡통이 날아

 

포물선을 그린다

 

 

한결 가벼워진 배낭끈을 올려 매고

 

한참을 걸어가다 또 다시 근질대는 병

 

냅다 퍽 솟아오른 페트병

 

내 발목이 아리다

 

 

 

 

- 「빈 깡통을 보면」전문

 

 

 

역설이다. 시인이 차버린 빈 깡통과 페트병은 바로 아주 특별하여 핸드폰을 누가 닦아주

 

는 힘이 있는 사람도 아닌, 말 한마디에 자식을 명문대학 보낼 만큼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닌, 물려받은 지분이 많은 재벌 2세, 3세도 아닌, 권력이 대를 잇는 이도 아닌 서로에게

 

별다를 것이 없는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비슷비슷한 길을 걸어 온 평범한 길 위의 내 모

 

습이다. 그래서 더욱 “깨부숴버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빈 깡통이 살아가는

 

방법은 “포물선” 을 그리며 이리저리 또 다른 깡통을 만나고 만나며 거대한 깡통의 군무

 

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깨우치는 일이 시인이 “도지는 병”으로 표

 

현한 이 병은 필시 어쩌면 명현현상일 것이다. 자학하는 듯 한 이 모습은 나아지듯 보이

 

다가도 “배낭끈을 올려 매고” 또다시 길을 가다가도 자꾸만 “근질대는 병”이라서 길가의

 

또 다른 평범한 내 모습인 “페트병”을 가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깨우쳐 주기를 넘어서 더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살라고 “내 발목”이 아리도록 “냅다 퍽” 차 버리는 것이다. 우리

 

의 몸속에, 마음속에 가득가득 들어 있던 불끈 솟는 그 무엇이 깡통을 박차고 나와 페트

 

병을 뚫고 나와 길가에, 들과 산에 흘러넘칠 때 비로소 그 병은 후유증 없이 사라지는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길에 차이는 너는 빈 깡통이지만 다 내주어 비어버린 너를 난 그

 

냥 보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곧작 낭만* 잘 골랑 끊어사 다

 

 

서리 꺼난 끔 오그라진 것도 괜찮을 탭주 아니여, 그 목수는 너무 까다로왕 그런 건

 

보민 그냥 *대껴분다 경허난 공부 잘한 놈은 딱 서울로 가버리고 나 은 빙신만 남았

 

구나 양 아니여 오그라진 낭이 산도 지키곡 고향도 지켬시네 경디 무사

 

 

육지서 막 들어암신디 알당도 난 모르키여

 

 

 

* 낭만 : 나무만

 

* 대껴분다 : 던져버린다

 

 

 

- 「오그라진 낭이 산 지킨다」전문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가 육지라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20여 년

 

육지에서 살았던 나도 거기가 육지란 걸 모르고 살았으니 말이다. 오그라진 낭도 오그라

 

진 세상에서 오그라진 낭들과 오그라진 언어로 오그라진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제 몸이

 

오그라지고 제 사는 세상이 오그라지고 구사하는 언어가 오그라지고 살아가는 시간이

 

오그라졌단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시인의 말처럼 “곧작” 낭들이 우리 사는 오그라진 땅

 

에 곧작게, 곧작게 점령을 하면서 쭉 뻗은 신작로가 오그라진 올레길을 막아서고 반

 

듯한 시멘트 담벼락이 오그라진 돌담을 짓누르고 칼로 재단한 듯 신항만이 마을 포구를

 

바닷물에 잠기게 하는 세상이다. “끔 오그라진 것”들은 정말 “괜찮을” 세상이 참세상

 

이 아닐까? 까다로운 목수들이 이 땅의 끔 오그라진 젊은이들을 대껴불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일까? 제주 땅을 보라, 어디 하나 오그라지지 않은 곳이 있는가? 아프리카에서

 

는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한다. “오그라진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머니의 오

 

그라진 뱃속에서 오그라진 자세를 하는 태아가 있고 오그라진 탯줄을 갖고 오그라진 모

 

양의 제주땅에 태어나 삼백 예순 오그라진 오름을 오르고 오그라진 올레를 지나 오그라

 

진 밭담을 넘어 오그라진 일출봉에서 오그라지며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 어쩌면 공부 잘

 

하면서 곧작 낭들이 한 번도 오그라져 본 적이 없는 그 관성 때문에, 한 번도 공부를 못

 

해 본적이 없는 그 점성 때문에 살아가면서 되돌아 볼 여지없이 권력에 취하는 그 마취

 

성 때문에 덜 곧작 육지낭들이 오그라진 제주로 제주로 막 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르겠

 

다. “산도 지키곡 고향도 지켬시네”라는 시인의 표현대로 산도 지키고 고향도 지키며 오

 

그라졌지만 절대 부러지지 않는 오그라진 시조 한 편 남기고 가도 좋을 일이다.

 

 

 

 

 

 

4. 조금 아플 때까지만 조이며 살기

 

 

 

한가위 보름달이 숨바꼭질하는 밤 활터에

 

 

허공에 길이나 내자고 욕심의 끈을 풀어

 

 

무심코 보낸 화살은 아무런 기척이 없네

 

 

언제 생각대로 관중貫中 소리 들어봤나

 

 

길을 찾는 맹인처럼 컴컴한 과녁을 향해

 

 

또 다시 시위를 당기네 퉁, 하고 답하네

 

 

 

- 「야사 夜射」전문

 

 

 

우리는 언제나 손에서 시위를 놓지 못하고 어제도 과녁을 향해 쏘았고 오늘도 살아있는

 

것, 심지어 죽은 것 마저 과녁으로 삼아 살고 있고 또 내일도 “퉁”, “퉁”, “퉁” 하는 소리

 

를 들으려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길을 찾는 맹인처럼 컴컴한 과녁을 향해”라고

 

표현하듯 어느 과녁 하나에서도 “관중貫中 소리” 듣기가 힘든 것은 청력마저 잃은 까닭

 

이 아니고 우리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 빗나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

 

「야사 夜射」라는 작품에서는 “허공에/ 길이나 내자고/ 욕심의/ 끈을 풀어// 무심코/ 보

 

낸 화살은/ 아무런/ 기척이 없네”에서 그의 삶을 반추反芻 해볼 만한 대목이라 할 수 있

 

겠다. 허공에 길을 낸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길을 낸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허공인 그를 지나 우리 무엇을 굳이 관중貫中 시키려하는가? 우리가 보낸 화살은 우리의

 

모습이면서 또 우리의 바람이라서 “퉁”하고 그가 내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귀가 먹은

 

시늉을 하고 눈이 안 보이는 시늉을 하며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다면 좋으리라. 사실, 우

 

리는 늘 빗나간 화살, 그러니까 과녁을 빗나간 화살에 집착하느라 누군가 나를 향해 “욕

 

심의 끈을 풀어” 날려 보낸 진심 어린 화살을 몸을 사리고 움츠리며 끝내는 피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과녁에 꽂히는 일 보다 빗나가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다. 그래도 내가

 

어느 한 사람의 홍심紅心 이 된다면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컴컴한 밤일지라도 말이다.

 

 

 

 

 

제멋대로 살아야 한다고 때때로 말하지만

 

네 삶을 들여다보면 헐거운 적 너무 많아

 

적당히 조여 주고 싶다

 

주제 파악 하라고

 

그러나 한량없이 조이고 조인다면

 

여유의 손길 하나 건네 줄 수 없어

 

적당히 풀어주고 싶다

 

꽉 조인 너를 보면

 

 

 

- 「나사」전문

 

 

 

지난겨울 한동안 외국산 가구들을 하루에도 몇 개씩 조립할 때가 있었다. 한참 전에 찾

 

아온 노안으로 하다 보니 이리 삐뚤 저리 삐뚤 하여 나사를 전동드릴로 조였다가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풀었다가 분해되어 있던 것들을 조립도를 보면서 하나씩 맞춰가다 보

 

면 나름 희열도 있는 작업이었다. 너무 심하게 조이면 파손이 되고 너무 헐겁게 조이면

 

덜렁거리기도 하고 참으로 조였다 풀었다 하는 단순한 과정 속 에서도 시인의 말처럼

 

“적당히 조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드르르 하는 전동드릴이 되었건 육간렌치

 

가 되었건 적당히 조여 주면서 작은 의자 하나라도 조립을 끝내고 나면 괜스레 시조 한

 

작품 쓴 것 같은 쾌감도 들곤 한다. 왜일까? 조였다 풀었다 하는 것이 그만큼 우리의 삶

 

을 닮아서가 아닐까? 시인은 분명 올곧게 문학의 걸으면서, 교원의 길을 걸으면서, 국궁

 

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 자신을 반듯하게 세우려고 조인 날들이 숱하게 많았으리라 생

 

각한다. 시인의 모습이 거울처럼 투영되는 모습을 그린「나사」는 시인으로서 7부 능선

 

너머, 8분 능선 향해 한 걸음씩 점점 완성되어 가는 평범하지만 매우 관조觀照적인 삶을

 

첫째 수에서는 우측으로 돌리며 조여 주고 둘째 수에서는 왼쪽으로 돌려 풀어주기도 하

 

며 마치 저울 추 같은 묵직한 삶을 읽히게 하는 작품이다.

 

 

 

 

 

길쭉한 돌 나 봉강* 실로 둥일* 묶엉

 

빙빙 돌리당 ‘아무 놈이나 맞으라’ 멍

 

하늘 위로 휙 던지면

 

 

아가가,

 

지 대가리 맞안

 

꿩새기* 생겨불언

 

 

 

 

* 얄미운 사람이 잘못하여 큰코다쳤을 때 속 시원하게 내지르는 말

 

* 봉강 : 주워

 

* 둥일 : 허리

 

* 꿩새기 : 꿩알

 

 

 

- 「잘콴다리여*」전문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 폭력이 도리어 가해자의 “대가리”에 “뀡새기” 생기게 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봉강” 던지는 돌은 그나마 잔챙이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돌이라도

 

되지 못하면 “아무나”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수도 없이 난타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

 

다. 하지만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풀잎에 눈 돌릴 겨를도 없이 바람에 날려 길가에 뒹구

 

는 어느 실종자 전단 한 번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숨이 차도록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을

 

시인이 말하는 허리 묶여 정신없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빙빙” 돌아가는 “길쭉한 돌” 인

 

줄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이 이 작품에서 비친다. 나만의 명예를 위해 나만의 풍요를 위

 

해 나만의 권력을 위해 불굴의 의지로 살아가는 일은 주먹만 한 돌이 아니라 바위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굴러가기도 하겠지만 자신을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를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에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바위처럼 무겁게 만들고 만다. “잘콴다리

 

여”, 풀잎을 무시한 죄, 내 식구 아니라고 못 본 척한 죄로 “잘콴다리여”. 누구나 질투에

 

불타는 심장 한 번쯤 가져봤으리라. 그리 살아가야 한다고, 그게 살아가는 이유라고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믿고 있으리라. “누군가 나를 보고 “잘콴다리여”라고 하면

 

정말 못되게 살기도 하였겠지만 나를 미워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살다가 큰코다쳤을 땐

 

그나마 “빙빙” 돌릴 수 있는 돌멩이 하나는 잡고 살고 있구나“라고....., 그리하면 부아가

 

치밀 때 최후에 쓸 병기 하나는 갖고 있구나 하고 흡족하겠다. 돌멩이 같은 당신의 허리

 

를 묶어 써먹다 차라리 사정없이 내 머리에 “꿩새기“ 생기도록 당신에게 흠씬 맞았으

 

면 좋겠다. 그게 행복이겠다. ”아가가“ 멍든 행복이어도 정신없이 ”빙빙“도는 세상, 내가

 

내게 말해도 좋겠다. ”잘콴다리여“, ”잘콴다리여“.

 

 

 

 

 

조한일 2011년『시조시학』으로 등단 hanilcho@hanmail.net

 

 

 

 

 

<<제주작가 57>> 2017년 여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