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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거티브 의식에서의 서정성과 시의 완성도 /권혁모 등록일 2018.01.15 21:30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602

□ 시조세계 2002년 겨울호 「지난 계절의 문제작․쟁점」원고


네거티브 의식에서의 서정성과 시의 완성도


권 혁 모


  Ⅰ

  흔히 우리는 어떤 풍경이나 이야기 혹은 글을 대할 경우 ‘詩的이다’ 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하얀 雪原을 배경으로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부터 명배우의 연기라든가, 가수의 애절한 노래 그리고 안개 내린 시골길의 낙락장송 또는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가로를 걸으며 ‘아! 참 시적이구나’ 하며 즐거워한다.

  시인 역시 그렇다. 정신문화의 고장이요, 양반 고을인 문향 안동에서 근세의 인물 중 이육사 만한 인물이 또 있겠는가? 가까운 영양에서는 조지훈, 오일도 만한 인물이 또 있겠는가? ‘詩’에서 비롯된 ‘詩的’이라든가 또는 ‘詩人’은 분명 예사의 언어가 아니며, 그만치 큰 감동과 아름다움을 지닌 고귀함의 상징일 것이다.

  특히 언어에서 ‘시적’이라는 표현은 일상어에 의한 글이 아닌, 여러 갈래의 문장 중 최고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목적 수행을 위한 기능어의 역할을 뛰어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詩的’이라는 표현은 동양의 詩觀에서 말하는 효용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독자들의 감성에 신선한 충격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백 년 동안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배경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시로 올곧게 자리잡은 시조는 과연 ‘詩的일 수 있는가?ꡑ하는 문제를 제기해 본다.  분명 시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 詩歌로서 ꡐ시적ꡑ이라는 표현에 근접하는 데 모자람도 없어야 함에도, 오늘의 현실은 반드시 그렇다고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금의 문학상은, 공로상이 아닌 경우 해당 영역에서 최고의 작품을 발표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심사하였노라고 심사평은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을 거듭 거듭 읽으며 고개를 흔들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결코 나만의 편견 혹은 눈 어두운 식견 때문일까? 수상의 반가움보다는 ‘이건 아닌데-’ 하는 의문과 실망감이 앞서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이전의 작품이 아무리 주옥같았다 하여도, 선정된 수상작에 이름을 덮었을 때 과연 공감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작품이었던가? 이것은 미래에도 해당되는 과제일 것이다.

  나는 혼자 읽기에 아까운 좋은 시를 발견할 땐, 곧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며 기쁨을 함께 나누려 한다. 훌륭한 시를 만나면 그만치 기분 좋은 순간이 된다. 실제로 참신한 당선작 혹은 추천작을 앞세운 新銳들에게 마음 속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큰상으로 선정된, 소위 최고의 수상 작품을 ‘혹 누가 보지는 않을까?’ 걱정 될 때도 있다. 그 작품으로 인하여 한 장르가 무더기로 폄하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땐 이 작품이 담긴 내용을 책상 위에 그냥 두지 않는다. 솔직히 이와 같은 작품이 속한 同道를 가며 비애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모든 것 다 덮어두고, 누구에게 마음껏 자랑해도 좋을 부끄럼 없는 작품에 합당한 것일까? 한 편으로는 아니 되겠기에, 또 한 편으로 보완해야만 할 정도였던가? 축하를 드려 맞이할 이면에서 슬픈 현실을 보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참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지만, 속이 편치 않아 더 이상은 읽을 수 없는 글이 정중한(?) ‘초대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큰 심사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Ⅱ

  ‘시조세계’ 가을호는 가을 들녘 만치 풍성하였다. 그것은 현대 시조의 미래를 예측하여도 좋을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흔히 吟風弄月이오, 時節歌舞 혹은 效用價値 측면을 일탈하여, 삶의 아픈 내재율로 다가오는 작품들이 눈길을 끌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자연과 삶의 현상들이 온전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온전한 상태가 되어버린 형태 속에는 그만치 절실한 삶의 이야기가 不要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현장은 언제나 未完이듯, 그 미완이라는 네거티브 구조에서 완성을 향한 강한 집념이 詩로 표현되어야 건강한 시가 되지 않을까?


  박권숙의 <바다가 있던 자리>는 바로 이러한 구조의 연장선에서 차가운 삶의 현장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사월의 거리>는 데모대가 쓸고 간 봄날의 눈 못 뜰 街路를 생각나게 한다.


입술이 시퍼래진 동생을 업고 우리가

매립지 방죽을 타고 기어 넘어갔을 때

물 속의 송신철탑은 추운 소리로 울었다.


날카로운 바위들이 검은 이마 빛내며

바다의 흰 갈비뼈 퉁겨 부르던 노래

붉게 튼 작은 손등에 해 가리고 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스팔트를 흔들 때

슬픔은 물보라꽃 기억들을 부풀리며

아파트 유리창마다 파도처럼 내걸린다.

        -박권숙의 <바다가 있던 자리> 전문


  모두가 가난했던 지난 시절, 입술이 시퍼래진 동생을 등에 업은 누이가 매립지의 방죽을 타고 기어 넘어갈 때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본다. 차가운 물 속에 맨발로 선 송신 철탑이 겨울 바람에 울고 있는 모습은 눈물겨운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바위들의 현실과 하얀 파도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를 대비시킨 가운데, 붉게 튼 작은 손등으로 해 가리고 서서 그 꿈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민들 삶의 보금자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슬픔은 물보라꽃 같은 기억을 부풀리며, 매립지에 들어선 아파트 유리창마다 파도처럼 내걸린다고 하였다. <바다가 있던 자리>는 가난에 찌들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든가,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보편적인 아픔을 세 편의 그림으로 그려 펼쳐 보이는 듯 하다.

  <사월의 거리에서>는 벚꽃 흩날리는 거리에서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학도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다. 이 땅에 민주를 꽃피운 4․19 의거를 단숨에 기억나게 한다. 怒濤같은 데모대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던 중, 벚꽃처럼 흩날리는 돌이며 최루탄 그리고 경찰이 쏘아대는 칼빈 실탄이 그날의 혼돈을 생각나게 한다.


명암을 흩뿌리는 벚꽃 잎에 봄은 취해

사월도 저문 사월이면 날개를 접은 거리

비상의 오랜 기억은 숨소리로 남아 있다.


척박한 이 땅에 분 그 짧았던 봄바람

우리가 던진 돌이 눈초리를 빛내며

이마에 피가 맺힌 채 돌아오는 별이 있다.

     - 박권숙의 <사월의 거리에서>


  독재와 자유! 그 명암을 흩뿌리는 벚꽃에 봄은 취해 있는데, 저문 사월의 거리는 젊은 꿈마저 접어야 했다. 그렇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 함성은 지금도 살아 숨결처럼 들려온다고 하였다. 자유가 길지 못했던 이 땅에 찾아온 봄이건만, 우리가 던진 엄중한 민중의 돌이 피투성이가 된 채 별빛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낙화가 된 연분홍 벚꽃잎이었던가?

  박권숙은 앞의 2편을 통하여 한 때의 가난이 남긴 시련과 독재에 항거하였던 지난 시절의 모순을 치유하고자 하고 있다. 그것은 이에 합당한 목적을 앞세우기 보다 현대시가 지닌 서정(lyric)에 더욱 근접하고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시(敍情詩)는 원래 리리크이다. 이의 어원은 하프를 닮은 고대 그리스의 악기 ‘리라’에 맞추어서 하는 노래(리리코스)였다고 한다. 감동과 정서를 노래한 리리크는 시형(詩形)이 짧고 그 시 자체가 음악적 리듬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서정시의 온전한 자리매김 값을 다하고 있는 형식이 시조이며, 역으로 시조는 진정한 서정시가 되어야 하는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박권숙의 감동과 정서는 바로 이러한 서정에 바탕을 둔 시조라는 형식의 짧은 詩였다. 그 속에서 진지한 삶의 현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기에 더욱 심금을 울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찬의 <무엇인가 수상하다> 역시 사회의 온전한 구조 형태가 아닌, 네거티브 의식에서 출발한다. 다만 박권숙의 2편에서 만나는 詩語의 전개가 多意的․수평적이라 한다면 지성찬의 시는 狹意的․수직적이다. 또한 앞의 작품이 독자의 상상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면, 지성찬의 <무엇인가 수상하다>는 시를 독자의 상상의 영역에 내려놓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奉天洞의 재개발 공사가 끝난 후에


收支를 맞추려는

수지지구로 달려갔다


죽어서

龍仁에 묻은 것,

다시 파서 들춰낸다.


오늘의 하늘에선 무엇인가 수상하다


재개발 설계도를

그리는 건 아닐는지


토지는

저의 주인도

땅 속에 묻는다.

    - 지성찬의 <무엇인가 수상하다>


  과연 땅은 무엇이던가? 생명을 있게 한 모태요,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살아가야 할 무한 꿈의 무대인 땅! 富를 간직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끝내 천추 누대를 향하여 묻어 둔 것까지 다시 들춰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에서조차 수상한 행동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헛된 욕망은, 끝내 주인까지도 제 땅에 묻어야 한다는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의 참삶은 과연 무엇일지, 약육강식의 생존 본능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가치관 앞에서 ꡒ죽어서 / 龍仁에 묻은 것, / 다시 파서 들춰낸다.ꡓ고 하는 모순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그리고 ꡒ토지는 / 저의 주인도 / 땅 속에 묻는다.ꡓ고 하는 한 시인의 고뇌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지성찬의 고뇌와 고발의 연장선에 김선희의 <가을 들판>이 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오늘의 농촌 현실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늙은 어미의 가슴팍처럼 숭숭 뚫린 가을 들판

바람맞은 고춧대가 기대 섰는 그 한켠에

공짜로 감 따가라는 외론 팻말 삐걱인다.


허리 휜 감나무가 여름 내내 켜들은 건

오촉짜리 전구 같은 감이었나 울음이었나

어미의 저문 가을도 속울음을 삼킨다.

    - 김선희의 <가을 들판> 전문


  농촌 들녘은 우리들 삶의 근원이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현장이다. 들녘의 산물인 생명의 열매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식자를 불러오게 하는 동기가 된다. 아무리 국가간의 무역 장벽이 무너져 외국 농산물이 밀려 들어온다고 하여도, 우리가 경작하는 농경지는 불멸의 국력이요, 또한 국가 존립의 안정적인 입지를 확고히 하는 초석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는 나약한 농민들은 울음으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가? 가을 들판도 나이 든 농부들의 가슴인양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한다. 형편없이 추락한 고추 시세 앞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며, 곱게 익은 감이지만 누구든 공짜로 따가라는 팻말만 외롭게 서있다는 것이다.

  농부들이 여름 내내 땀흘리며 희망을 간직해 온 것이란, 허리가 휘도록 오랜 세월을 견뎌온 5촉짜리 전구같은 감이었는지, 아니면 슬픈 울음이었는지? 반문하고 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에게 다가온 가을이란, 화려한 겉과는 달리 속울음을 삼키게 하는 것이라 한다. 우리가 처한 농촌 현실은 고추라든가 감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세계를 향한 열린 경제로 진입하려는 시점에서의 필연적인 과정에 처한, 어두운 한 단면을 김선희는 그들의 편에 서서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강상돈의 <조간 신문을 보다가> 역시 앞의 작품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 다만 김선희의 <가을들판>보다 더욱 직설적이라는 데 있다. 시에는 애매성, 이중성, 함축성 등 다의적인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도 그 품격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 시가 너무 직설로 흐른다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장애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신열을 앓고 있다.

머리 헤친 반달이


젖 물리듯 놓지 않는

샅바 싸움 한창일 때


시간은

욕설로 앉아

지면을 채우고 있다.


몸 비빈 활자들이

새벽길을 가르면


여의도 찌든 공해

두통으로 번져오고


오늘은 한판 배지기로

내동댕이치고 싶다.

    - 강상돈의 <조간 신문을 보다가> 전문


  강상돈은 조간 신문에서 머리 헤친 반달이 신열을 앓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 젖 물리듯 놓지 않는 샅바 싸움이 한창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참 소중한 시간들이 욕설이 되어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지면이 새벽을 가르고 배달되면 정치 1번지인 여의도 공해가 두통으로 번져 온다고 한다. 이런 병적인 사회 현상, 특히 정치인(정당인)들을 비롯한 모든 병리 현상들을 배지기 한 판으로 내동댕이 치고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네거티브 의식에서의 사회 현상 즉, 외적 환경에서의 갈등 구조를 話頭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런 류의 참여(?) 작품은 고발이 우선이거나, 어떤 결론을 요구하거나, 목적적이거나, 시시비비의 가치 창조를 전제할 수 있는 우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감성쪽보다는 냉철한 이성쪽에서 가려져야 할 온전한 가치 판단이 지나치게 목적성을 띤 시로 형상화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회 현상은 주어진 사회 구조의 엄격한 논리이며, 이는 다분히 주관성을 지닌 시인의 감성으로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거티브 구조에서의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 하여도, 보다 詩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서정성의 확보와 시의 완성도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시는 그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의 확대를 가져오게 하여 감동의 자리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Ⅲ

  시는 ꡒ넘쳐흐르는 정감의 자연적 발로(Wordsworth)ꡓ라 하였듯이, 서정시는 주관적인 개성의 문학인 동시에 자신의 감정 표현이다. 시의 장르로서 서정시가 문학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의 시인들에 의해서였다. 인간 개인의 종교적 정조(情操)에 바탕을 둔 사랑의 노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김남환의 <抒情 셋>에는 진하디진한 사랑이 담긴 서정시였지만, 그 사랑은 모두가 ‘있음’에서 비롯된 ‘不在’의 恨이었다.


  1. 燒紙

하늘길 열어 놓고

당신 생각 접습니다


긴 슬픔 친친 감고

눈물로 엮은 이태


두 손끝 뜨는 쌍무지개

아스라이 올립니다.


  2. 이영도의 추억

타는 초록 그냥 두고

눈 못 감겠다던 님


설악산 깊은 숲 속

밀화부리로 울어


삼십년 숨죽인 내 연못

봄마다 흔드느니.


  3. 태풍에 갇혀

성난 짐승떼처럼

몰아치는 폭풍 속을


사랑도 별도 잠긴

이승의 속울음 하나


목 젖은 꽃등에 실어

絶海에 띄우느니.

   - 김남환의 <抒情 셋>


  <抒情 셋> 중 ‘燒紙’는, 얼마나 절절한 사랑이었으면 “하늘길 열로 놓고 / 당신 생각 접습니다.”라고 해야 할까? ‘접음’으로 다시 펼칠 수 있다는 反語는, 강한 부정의 긍정을 뜻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리하여 슬픔을 몸에 감고 눈물로 지새우며, 언제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자신의 두 손끝에 쌍무지개를 올린다고 하였다.

ꡐ이영도의 추억ꡑ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두고 눈 못 감겠다던 이영도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설악 깊은 숲에 와서 밀화 부리로 울고 있는 이영도와의 추억이지만 ꡒ삼십 년 숨죽인 내 연못을 봄마다 흔든다ꡓ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태풍에 갇혀’에서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 사랑도 별도 갇혀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울음을 꽃등에 실어서 이상향이 될 먼바다에 띄어보낸다고 하였다. 사랑은 이처럼 진한 속울음이 되어 우리를 묶고 또 묶는 것일까? 김남환의 서정은 아름다움을 넘어, 나 안에서 너를 찾는 상관 관계로부터 비롯된 영롱한 사랑의 별빛이었다. 그 사랑은 喜가 아닌 悲에 있다.


  김종윤의 <갈대의 노래>는 처절했던 절망의 시작과 끝이다. 그러나 그 절망은 그만치 단단한 자기 확인과 함께 극복의 자신감에 있다.


1

그늘도 가느다란 슬픔 많은 갈래

목청 뽑아 들다 도로 놓는 가슴이여

격정도 격한 격정은 몸으로나 퍼덕이고.


2

피흘리고 싶습니다. 산발한 그리움으로

나자빠지고 싶습니다. 허망한 발목으로

그 어느 어눌한 직립,

시린 마음 곁에.

  - 김종윤의 <갈대의 노래> 전문


  갈대는 그렇게 많은 육신의 갈래로 슬픔을 뽑아들고 서 있는지. 저마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목청 뽑아 올리다 다시 땅으로 놓는 안타까운 가슴이라 한다. 그러기에 격한 격정일수록 목청을 뽑는 것이 아니라 온몸 눕혀 퍼득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대는 머릿결 풀어 헤진 그리움으로 피 흘리고 싶었다고 한다. 똑바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어색한 모습 곁에, 허망한 발목의 갈대 마냥 그렇게 나자빠지길 바랐다. 물론 갈대를 앞세운 김종윤 자신이다. 이는 순전히 자신을 버림으로 하여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사랑’과 ‘순정’의 갈대가 아닌, 철저히 소멸로 가는 갈대가 되어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함은 흔히 佛家에서 말하는 윤회의 실상을 보는 듯 하다.


어느새 세월은 가고 나는 이제 썩은 나무

귀를 대어 사랑 듣던 그리움은 낙엽 되어

쓸쓸히 떨어져 내릴 뿐 가슴은 빈 등걸이다.


봄날에 새 잎 돋던 우리네 젊음들은

쓰러져 바람 앞에 흔들리지도 못하는 것을

왜 이리 그리워하며 늙은 짐승이 되는가.


눈치 보며 사는 세상 조금은 터득한다.

목련이 지고 나면 세월이 가는 뜻을

어떻게 지워야 하나. 아 생각이 외롭다.

      -류상덕의 <빈방> 전문


  류상덕의 <빈방>은 아무 것도 없는 不在의 빈방이 아닌, 자신의 온갖 ‘있음’의 세계로 가득 찬 빈방이었다. 사랑과 젊음과 세월 … 그런 것들이 다 가버린(실제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은 이미 허무의 영역을 넘어선 엄숙한 순간에 이르고 있다. 빈방을 이야기하는 보법이 세월의 강을 흘러가는 뗏목인양 유장(悠長)하기만 하다.

  한 사람이 만나는 세월 앞에서 작자는 썩은 나무에 불가한 것인가? 지난 사랑의 그리움은 낙엽으로 지고, 자신은 텅빈 고목이었다 한다. 그리고 새 잎 돋던 젊음은 이제 바람 앞에서 부질없이 야위어 가는데, 그날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도 짐승(본능적인 혹은 슬픈 존재)이 되는가 하고 안타까운 반문을 한다.

  그리하여 이제 이만한 나이에서 눈치 보며 사는 세상도 터득하였다고 한다. 목련과 함께 가는 세월의 뜻도 안다 한다. 다시 올 날을 위하여 지난날을 지워야 하는 외로움을 가슴앓이하고 있는 것이다.  <빈방>은 바로 이러한 그리운 것들이 가득찬 ‘존재’의 방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쓸쓸한 공간으로 초대(?) 될 것이다.


  1. 활

대체 어디로 향한 시간들이 거기에 묶여

천궁으로 거기에 묶여 휘어질 만큼 휘어져서


뼈아픈

한 생애를 저리

쏘아보내곤 했던가.


  2. 톱

목질의 향기에 온몸 깊숙이 들이밀던

그 완강한 힘도 이젠 녹슬고 삭아내려

헛간에 버려진 채로

바람길을 지키느니.


  3. 코뚜래

생살 꿰뚫려

비탈에 묶인 생애


그렇듯 붙잡히어

허위허위 가는 길을


육모초

길로 자라나

흔들리고 있는가.

    - 이정환의 <원에 관하여 1> 부분


  이정환은  <원에 관하여> 1에서 11까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물상들을 단수 연작으로 하여 소시집을 엮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 혹은 지난 시절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특히 <원에 관하여․ 1>의 ‘1.활’은 시간이 거기에 묶여 어디론가 떠나며, 휘어져 뼈아픈 생애를 쏘아 보내고 있느냐? 하고 반문한다. ‘2.톱’은 쓸모없이 삭아서 버려진 톱에 관한 허무를 노래하였고, ‘3.코뚜래’는 생살 뚫린 소가 가고 있는 슬픈 생의 가운데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육모초의 들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정환이 만나는 원은 가시적인 것에서부터 비롯된 원이 아니라, 그 물상 깊숙히 내재한 진면목으로서의 원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의 내면에는 언제나 존재의 외피를 벗고 그 사물에 대하여 새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언어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인용한 시 외에도 이정환의 소시집에는 ‘박’을 일컬어 “~한 마실 / 들어올리는 / 저 열 나흗날 밤의 만월!”이라 하였는가 하면, ‘은장도’는 “~일생에 / 단 한번을 위해 / 하늘에 벼린 칼날!”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사물을 새롭게 보고 이에 합당한 질서를 부여하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며, 매 편마다 서정성을 담아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김문억의 <소낙비>는 사랑의 노래이다. 그것도 아픈 사랑이다. 사랑을 소나기에 치환하여 두드리는 빗소리 마냥 韻이 척척 들어맞는다. 비유할 것 다 비유하며 드러낼 말 다 드러내는, 그리하여 속 시원한 소나기를 만나게 된다.


  소낙비


너 어디 있니 지금

나 어디 있니 지금

목마른 갈기를 세우고

달려가는 천군만마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정복하는 것이라고


칼 벼리는 번갯불

진군하는 천둥소리

빗물은 눈물이 되어

뿌리고 가는 말발굽 소리


사랑은 여우같은 것이라고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 김문억의 <소낙비> 전문


  소나기는 목마른 갈기를 세우고 달려가는 千軍萬馬였던가? 김문억에게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고, 정복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칼을 벼리는 번갯불이며, 진군하는 천둥소리였다고 한다. 눈물을 뿌리고 가는 말발굽 소리, 그리하여 여우같이 교활한 사랑은 실존이 아닌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 한다.

  어렵지 않게 연상되어지는 은유와 직유, 장과 장 사이의 적절한 공간 확보는 참 경쾌하다. 소나기를 통하여 사랑의 관계를 추억하며, 또한 칼 벼리는 번개불이라든가 말발굽 소리 등을 연관 짓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감동과 서정을 주관적으로 노래한 짧은 詩形(시조), <소낙비>라는 리리크는 시 자체의 음악적 리듬을 온전히 지닌 가운데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어지는  <失業日誌>는, 앞의 내면 세계를 담은 작품과는 달리 우리가 처한 사회적인 현실을 통절히 담아내고 있다. 누구나 실업자의 현실에 처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아픔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기우는 해보다 돋는 해가 더 속상할 때가 있다.

꾸부리고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다 보면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일이 울컥 슬플 때가 있다.


몇 번씩 개칠을 하며 바쁜 해를 잡아보지만

버렸던 폐품까지 부유물로 떠올라서

참담한 흔적만 남는 내 하루가 가파른 날.


올라봐도 흘러내리는 미끄럼타기 매양 그 자리

벙어리 전화기와 시시한 책과 컴퓨터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헛기침 소리

헛발자국 소리.

  - 김문억의  <失業日誌> 전문


  김문억은 자신이 직장에서 퇴출되는 속상함보다 이제 막 돋는 해에 속하는 귀여운 자녀가 취업할 수 없음에 더욱 통탄해 한단다. 자신은 직장에서 물러났지만 살아가기 위하여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부질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밥 먹어야 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바쁜 일상이 되고자 고심하고 있지만, 지난날 소중히 다루지 않았던 부분까지 다시 다가와서 그 흔적이 참담히 남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희망을 간직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에 자신이 있었다. 이제 만나야 할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는 그런 자리에서 ꡒ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ꡓ하며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다. 김문억의 <실업일지>는 네거티브 의식에서의 서정성을 확보하여 오늘의 삶의 현장을 독자의 몫으로 되돌리려는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다.


  제6회 시조세계 신인상은 만만치 않는 작품이다. 최근의 ‘시조세계’에서 신인상을 통한 신인들의 작품 역량은 빼어나다. 이러한 작품이야말로 우리 시조단의 미래를 충분히 밝게 할 동기 요소가 될 것이다. 작품의 질(수준)과는 무관하게 무더기로 추천되는 잡지사의 혼돈 속에서, 계속적으로 참신한 작품을 통한 신인 배출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시조단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신의 매너리즘에 빠져 안일하게 글을 발표하는 기성인들을 부끄럽게 할만치, ‘시조세계’ 신인상 출신들은 건강한 시를 발표하고 있는 반증이다. 특히 이 두 작품의 步(foot)와 行(line)은 시원시원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신인상 당선작 김언양의  <밤바다, 그 달빛 彈奏>는 가을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감동을 얹어주는 신인상 당선작도 있었던가?


바다 위에 내려앉는 서늘한 초승달빛

교교한 그 눈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다는 자꾸 몸을 뒤척여

흰 파도로 출렁인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워 일으키듯

심장에서 뿜어내는 검붉은 혈맥의 소리를

바다는 만나고 싶었다.

쓰러지고 싶었다.


오래도록 고개 숙인 채 긴 한숨 토해내며

아득히 먼 세상의 그리운 이라도 기다리는가

적멸의 달빛 탄주를 꿈결처럼 듣는가.


무심히 내리는 달빛과 뒤척이는 밤바다가

그쯤에서 마주보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오히려 그 아름다운 관계가

공명처럼 울린다.

    - 김언양의 신인상 당선작 <밤바다, 그 달빛 彈奏> 전문


  김언양은 바다 위 서늘한 초승달빛의 눈길을 감당할 수 없음에, 바다는 몸을 뒤척여 파도로 출렁거린다고 一筆의 문을 연다. 바다는 자신의 혈맥 소리를 들으려 또 다른 자신을 만나 쓰러지고 싶었으며, 또한 오래도록 긴 한숨 토하며 먼 곳의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지? 바다는 고요의 달빛 탄주를 꿈결처럼 듣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달빛과 뒤척이는 바다가 교감하며 자신을 지키고 있는데, 바다와 달빛-그 둘의 아름다운 관계가 공명처럼 울린다고 하였다.

  김언양에게 그 밤바다는 달빛을 분칠한 잔잔한 파도로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몸을 뒤척여 흰 파도로 출렁인다 → 만나고 싶었다. 쓰러지고 싶었다 → 달빛 탄주를 꿈결처럼 듣는가 → 아름다운 관계가 공명처럼 울린다.」로 이어지는 4首의 종장 연결은 온전한 詩(시조)가 되어 완성도를 높였다.  <밤바다, 그 달빛 彈奏>가 보여주는 건강한 서정성은, 우리 민족시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詩)와 노래(歌)가 있음을 증명해 주게 될 것이다.


  장승심의 신인상 당선작인 <海松> 역시 만만치 않다.


파도가 물보라로 덮치어 오는 날은

허옇게 앓아 누워 온몸으로 울다가도

의연히 떨치고 일어나 바닷가를 지킨다.


수평선 저울질하다 돌아오는 만선의 배

갈매기 나래짓에 힘주어서 인도하고

은물결 해조음 따라 나직한 律 읊조린다.


그 여운 바닷물에 스며들다 사라지면

물가에 나앉은 마음 집어등 불빛에 젖고

그윽이 감은 눈매엔 적막 마저 깊어간다.

    - 장승심의 신인상 당선작 <海松> 전문


  파도가 물보라로 덮치는 날, 앓아 누운 해송은 온몸으로 울다가 의연히 다시 일어나 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발단된다. 그리고 수평선 넘어에서 돌아오는 만선의 배에게는 힘과 용기를 주어 바닷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바다의 아름다운 여운을 노래한다. 그리하여 해 저물면 물가에 나앉았지만 배의 집어등에 전신이 젖어들고, 소나무의 감은 눈매에 바닷가의 적막도 깊어간다는 것이다. 日暮의 바닷가에 선 해송은 한 그루 나무였지만, 끝내는 작가 자신이었다. 자신에게는 물보라 덮치어 앓아 누운 날이 있었고, 律을 읊조리던 날이며 적막이 깇어가는 날이 있었던 것이다.

  ‘시조세계’ 가을호에 발표된 김언양의 <밤바다, 그 달빛 彈奏>와 장승심의  <海松>은 이제 시조단의 문을 여는 순간으로, 주옥 같은 당선작의 첫출발이야말로 시조단에 커다란 등불을 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신인들이 배출될수록 기성 시인들의 뼈 아픈 자기 성찰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에 온 것이다.


  英祖 때의 歌客 李世春이 ꡐ시조ꡑ라 하였으나 그 뒤 歌詞까지 합쳐 불렀던 시조! 이제 時節歌調의 위치에서 한 걸음 비약하여 우리의 민족시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곡조를 합친 의미를 떠나 내재율에 의한 우리 민족 정형의 시가 된 것이다. 시의 본령은 역시 서정성에 있기에 이를 바탕으로 한 오늘의 삶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서정은 온전한 사회 구조의 현실보다는, 네거티브 구조에서 포지티브를 향한 강렬한 몸부림에 우리의 정감이 더욱 쏠리게 될 것이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외적 환경과 내적 환경 사이를 오가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서우승의 작품 <각방 쓰기>가 참 재미있다. 온전치 못한 나의 글을 덮으며 한 번 더 읽고 싶었다. 『내 무료가 / 뜬금없이 / 땅콩껍질 속에 들어가 // 이 방 저 방 / 찾아다니며 / 굳이 각방 쓰냐 물으니 // 그리움 / 없는 사랑이 어디 / 사랑 축에 드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