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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명숙 시조집 <맹물 같고 맨밥 같은>
등록일
2023.01.30 12:55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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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의作意, 혹은 작전作戰은 언제나 감쪽같다. 눈치 챌 일도 없이 그가 들이대는 고성능 투시카메라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된다. 비로소 읽는 이도 심안이 열린다. 아무렇지 않게 보던 사물들의 앞과 뒤, 안과 밖, 멀리 가까이가 속속들이 특별한 파노라마로 보이게 하는 그의 마법에 덜미가 잡힌다.
그믐달이 흘러들고 나가는 사이의 짦은 시간에 기대앉은 존재, 그리고 그가 전하는 불가사의한 말씀의 손짓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무량한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반가사유」). 그런가 하면 서해의 낙조 앞에서 금박댕기 물려 줄 엄마를 기다리는 종종머리 소녀를 만나기도 한다(「서해에서 기다릴게요」).
결국 그의 시를 읽는 이유는 유한한 음역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노래의 천변만화 속에서, 독자의 미적 욕구가 소
스라치도록 밀려드는 그 어떤 엑스터시에 빠져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 신필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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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열린시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수상.
시집 『은빛 소나기』, 『어머니와 어머니가』, 『그늘의 문장』, 시선집 『찔레꽃 수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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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
입꼬리만큼 마음의 꼬리를 끌어올리고
사유는 반만 접어 무릎 위로 올린다
그믐을 흘러들어온 달빛이 정박 중이다
떠날 듯 머무를 듯 잠길 듯 떠오를 듯
뺨에 물린 손가락으로 고요를 짚는 동안
눈초리 휘어진 달빛이 그믐을 빠져나간다
적벽
성냥불 타들어가듯 물빛 홀로 꼬부라지는데
정강이 일으켜 세우고 적벽이 건너온다
징검돌 하나씩 버리면서 저벅저벅 건너온다
어둠살 들이치는 물결과 물결 사이로
금천강 저녁답 실핏줄을 터트리며
적벽이 물 건너온다 들소처럼 건너온다
해거름 물소리는 솔기마다 굵어지는데
성미 급한 어둠을 한 걸음씩 들어올리며
핏물 밴 적벽 한 채가 철벅철벅 건너온다
해바라기 한 송이의 눈동자
누구나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총소리를 먼저 맞고 알아서 죽는거지
촘촘히 총탄이 박힌 목소리가 들리지 않니?
총알받이 되어서 석양에 목을 뉘며
외로운 언덕의 총소리로 타종되는
저것 봐, 큰 해바라기 한 송이의 눈동자들
지어 紙
魚
글자와 글자 사이를 헤험치며 놀다가
배고프면 퉁퉁한 글자 한 쪽 베어 먹고
건너편 음풍농월로 돌아가서 누웠다가
자음을 들쳐업고 모음까지 가는 길에
행간을 돌고 돌다 어질머리 찧다보면
글이 날 파묻을 거야, 세상을 걸어 잠그고
집 한 벌
허허벌판 꺼질듯 집 한 벌이 서 있네
무명실로 짜 올린 허름한 피륙 한 벌로
거미가 밑실 뽑으며 처마를 들어 올리네
또랑광대처럼
또랑광대처럼 저잘대며 냇물이 흘러간다
넉살좋은 거지처럼 사설을 늘어놓는다
함박문 한 상 받은 아침에 목청을 풀고 있다
잡동사니 마음도 옷고름처럼 풀려나간다
가문 겨울 한 대목을 꺾어 보다 뉘어 보다
귀썰미 밝아진 물소리가 함박눈을 갉아먹는다
모과처럼
-정진규
썩는 것도 삶이라던 선생은 잘 썩었을까
알약을 가마니로 먹었으니, 틀렸다고
책상 위 모과처럼 썩기는, 글렀다 하시더니
저승 냄새 서둘러 몸 냄새로 맡고서는
빨리 썩고 잘 썩기를 그리도 바라시더니
거기선 어떠하신가, 모과보다 어떠신가
소녀
총총 땋은 네 머리가 이학으로 여물어가던
보리밭 여름 한철이 새상 모르게 일렁일 때
깜부기 풀어헤친 머리로 나도 거기 서 있었지
소쩍
제 살을 다 발라서 소반에 차려놓고
남은 뼈로 절하는 한 사내를 바라보네
울음도 굶어야 하는 소쩍새가 그 절 받네
왕, 버들
새끼 꼬듯 한번 꼬고 똬리 틀 듯 한번 틀며
버들중의 버들로 만수무강 하시려나
용마루 걷어버리고 치렁치렁 사시려나
다리 꼬듯 허리 꼬고 몸 틀 듯 마음 틀며
이무기 중 이무기로 세세년년 누리시려나
용 틀며 용솟음치며 봄하늘 굽이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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