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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희
전북 익산 출생, 제7회 가람시좁개일장 장원, 2017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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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몸의 단을 쌓는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허물어지는 척추를 올곧게 추스르다
외줄에 무너지는 햇빛 산란의 유리창 밖
언제였나 이제는 아득해진 서른 즈음
먹이사슬 맨 위에서 눈 부라린 그 죄로
속없이 뽑혀 나오는 부끄러운 고해성사
매달린 허공 속 황망함을 닦아내며
그대에게 다가선다 아슬아슬 손 내민다
아직도 뜨거운 오후 신문지로 내걸린 놀
올빼미
두 눈을 부릅떠도 지켜낼 수 없는 것
사방에 목 늘인 어눌한 저 말더듬이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냉가슴 가릉대다
식어가는 달빛을 끌어안고 애 끓이는 밤
토방 끝 검은 괭이 눈초리 닿는 곳에
우수수 별빛 떨어져 그리움을 덮고 있다
저 낡은 귀틀집 네모난 상자 속에
깊고도 아득한 먼 마음을 꺼내어
슥슥슥 무딘 발톱 저 새
이승의 끝 잡고 운다
왕궁리에서 쓰는 편지
내 맘속 풀지 못한 그리움 하나 있다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풍탁에 바람을 걸어
그림자로 늙어간들
차오르는 달빛조차 감당할 수 없을 즈음
잘생긴 탑 하나 조용히 옷을 벗는다
손길이 닿기는 했을까
차마 못 지운 떨림 하나
아, 미륵의 땅 여자 되어 한 천년은 살아봐야
옥개석 휘어지는 그 아픔을 가늠할지
늦가을 왕궁리에서 쓴다
그대
그립다
어머니의 밭
꽃상추 네다섯 평 심어보니 알겠네
짧은 밤을 깨우던 긴 신음의 흔적들로
가풀막 자갈밭에서 허리 굽던 육자배기
마디마디 부풀어서 쑤셔대는 관절통
온밤을 앓다가도 무쇠솥 달군 새벽
토방 끝 마른 시래기로 앉으신 울 어머니
묵정밭 도라지꽃 자꾸만 보인다니
헐거운 신발 신겨 뒤란 가는 길
목젖에 응어리 하나 뜨겁게 걸려 있다
토우
한평생이 외롭고 서러워 널 품었느냐
집 한 채 얻어 질리도록 함께 살자
백골이 되어버린 맹세 부릅뜨고 서 있다
흙으로 널 빚듯 마음으로 나를 빚어
세월 다 버리고 들어앉은 이 적막
긴 어둠 하얗게 삭혀 사래치는 몸뚱어리
한 사람만 그 한사람만 죽도록 흠모한 죄
내 생에 비늘 떠서 전탑을 쌓으리라
회벽에 낱낱이 적어 그대 혼을 부르리라
이명
기둥 저쪽 사각사각 달빛을 갉아 먹는다
혼불처럼 번득이는 느리지만 분명한
구천의 하얀 다리에 밀려오는 어둠의 벽
뒤척이다 마주친 벼랑 박을 허물고
귓속에서 목뒤에서 느려진 심장에서
반닫이 눈동자 깊이 조용한 저 아우성
부수고 짓밟고 완전하게 치웠는데
흐릿한 눈초리 밤새워 부벼댄다
죽지 끝 황토물 휘도는 그 퇴화한 귀 울음
각시수련
속에서 천불이라고 훌훌 벗던 어머니
물려받은 몸뚱이는 늘 화로다
연못에 뛰어든 여름비
화병火病인가
안개 속이다
150센티 말상인 샛각시에 밀려나
눈물로 넘쳐났을 엄마 집 연못 위에
불 없이 타고 남겨진
새하얀 재
딱 한 줌
화살나무
나는 늘
타오르는 불 속에 있었다
너의 그 겨자씨만 한 불씨가 처음
발목을 태울때까지는 두렵지도 않더니
사르고 또 살라도 태우지 못하는
불이 불을 삼켜도
타지 않는 그 불
나는 늘 꺼지지 않는 그리움 속
불이었다
창포
쪽문 열고 댓잎 소리 홀로 쫓던 어머니
다듬이질 날 세워 짚어가는 그늘 저쪽
그믐달 파랗게 질려 와르르 무너진
귀 닫힌 옴팡집 문고리 잡던 바람 소리
삼단같이 얹었다가 삼단 같이 풀어내
봄 한 촉 갈기를 세운 청자물빛 명주고름
목백일홍
자궁이 열렸다 바람의 끝을 놓았다
발가락을 찌르던 묻힌 길의 가시들이
척추를 온통 포진한 전쟁 같은 그 여름 날
무심히 피고 지던 내 첫사랑 다시 왔나
빗장을 허물어뜨린 가려움증 깊숙이
배반의 혀끝에 핀 열꽃, 몸 이울며 쏟는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