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월
사랑은 스무날에 한 번씩 왔다가 간다 마야 달력은 18월 뒤에 닷새를 추가했다 남겨둔, 허기로 굶은 날 너라는 울(鬱) 속에 있다 망초꽃 흰 꽃잎 조금씩 장맛비에 비벼졌다 허공에 버무러진 가늘게 핀 슬픔들 어렴풋 기척이 있어 귀 모은다, 멀리서... 첩첩한 페이지 속 길이 문득 일어서면 흙 묻은 신을 신고 떠나는 이 보인다 앉았다 떠난 자리에 두고 간, 흰 손들! 우물로 가는 계단 내가 사랑했던 여름날 그 계단은 야트막한 언덕 너머 풀 욹어 가려진 곳, 길에 떨 군 꽃 감물 적신 듯 축축하더니 누군지도 모를 마 음 다 받아낸 뒤에야 그 짙은 마음의 음지는 물 그늘에 잠겼으니 제비집 제비집을 걷어낸 후 온몸이 근절거린다 말라붙은 진흙이 비듬처럼 쏟아질 때 땀 냄새 물큰하게 밴 격정이 훅 꺼진다 산란의 기운으로 열꽃 피던 둥지에서 날개 아래 노랗게 벌어지던 어린 입들 과수댁 처마에 걸려 어슷하고 축축하던 무덤 향한 길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둥글고 옴팍하게 새끼들을 가두어둔 제비집, 깃털 부풀리며 긁적이던 그 몸들 장마 풀 욱은 덤불 속에 구덩이가 깊어간다 온갖 벌레 짐승 소리 진득하게 엉겨붙은 불붙은 생의 난장이다 잔치는 곧 끝날 듯 얼굴엔 수심 깊은 비구름이 몰려든다 이녁따라 살고 죽던 상처 난 그늘 모아 한바탕 쏟을 기세다 온몸이 흥건하다 강물 불어 굽이치는 소리가 밀려온다 흰 몸으로 끌어온 가계사의 골 울음에 축축한 손목을 당기면 물에 둥둥 떠 있는, 철거 저 노령의 건물을 견뎌왔던 철근 가닥들 뭉툭해진 손가락을 허공에 쑤셔넣는다 내 몸의 절개지 위에 걸려있는 기억은 종이꽃 가려는가, 꽃술 묶은 실매듭을 풀어놓고 벚꽃 환한 공중에서 길을 여는 상두소리 어룽진 4월을 지나는 가시 박힌 흰 손들! 4월 부고장이 올 때면 사립문에 꽂아뒀다 버드내 송 상가 부고 앞에 문맹이었던 그 눈길, 지네 닮은 글자들 건너는 지 저릿했다 할머니 머리칼은 흰 닥종이 빛이었다 그 뒷머리 외젖가락 빗장이 질러졌다 집으로 들이지 못한 꽃이 길 밖에서 쏟아졌다. 이장移葬 장맛비에 윤오월이 오락가락 머물렀다 무덤 밑을 흘러가는 황천 가에 닿았다 업경(業鏡)을 들여다보는 중 흰 그림자 지나간다 약수(弱水)의 강기슭에 널배를 띄운 후로 손 없이 구부러진 어머니, 공달 맞아 그 마음 강 건넜다 어깨에 핀, 꽃-무한! ------------ 염창권 1960년 전남 보성 출생 한국교원대 박사 졸업(1994) 신춘문예에 시조(1990 동아일보), 동시(1991 소년중앙), 시(1996 서울신문) 등과 신인상 평론 (1992 겨례시조) 당선 시집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일상들> 시조집 <햇살의 길>, <숨>, <호두껍질 속의 별>외 한국비평문학상 수상(우수상), 무등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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