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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염창권 시인 시집엿보기 등록일 2019.03.06 08:36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577

염창권.jpg


18월

 

 

사랑은 스무날에 한 번씩 왔다가 간다

마야 달력은 18월 뒤에 닷새를 추가했다

 

남겨둔, 허기로 굶은 날

 

너라는 울(鬱) 속에 있다

 

 

망초꽃

 

 

흰 꽃잎 조금씩 장맛비에 비벼졌다

허공에 버무러진 가늘게 핀 슬픔들

어렴풋 기척이 있어

귀 모은다, 멀리서...

 

첩첩한 페이지 속 길이 문득 일어서면

흙 묻은 신을 신고 떠나는 이 보인다

앉았다 떠난 자리에 두고 간,

흰 손들!

 

 

우물로 가는 계단

 

 

내가 사랑했던 여름날 그 계단은

 

야트막한 언덕 너머 풀 욹어 가려진 곳, 길에 떨

군 꽃 감물 적신 듯 축축하더니 누군지도 모를 마

음 다 받아낸 뒤에야

 

그 짙은 마음의 음지는 물 그늘에 잠겼으니

 

 

제비집

 

 

제비집을 걷어낸 후 온몸이 근절거린다

말라붙은 진흙이 비듬처럼 쏟아질 때

땀 냄새 물큰하게 밴 격정이 훅 꺼진다

 

산란의 기운으로 열꽃 피던 둥지에서

날개 아래 노랗게 벌어지던 어린 입들

과수댁 처마에 걸려 어슷하고 축축하던

 

무덤 향한 길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둥글고 옴팍하게 새끼들을 가두어둔

제비집, 깃털 부풀리며 긁적이던 그 몸들

 

 

장마

 

 

풀 욱은 덤불 속에 구덩이가 깊어간다

온갖 벌레 짐승 소리 진득하게 엉겨붙은

불붙은 생의 난장이다

잔치는 곧 끝날 듯

 

얼굴엔 수심 깊은 비구름이 몰려든다

이녁따라 살고 죽던 상처 난 그늘 모아

한바탕 쏟을 기세다

온몸이 흥건하다

 

강물 불어 굽이치는 소리가 밀려온다

흰 몸으로 끌어온 가계사의 골 울음에

축축한 손목을 당기면

물에 둥둥 떠 있는, 

 

 

철거

 

 

저 노령의 건물을 견뎌왔던

철근 가닥들

 

뭉툭해진 손가락을 허공에 쑤셔넣는다

 

내 몸의 절개지 위에

걸려있는 기억은

 

 

종이꽃

 

 

가려는가,

꽃술 묶은 실매듭을 풀어놓고

 

벚꽃 환한 공중에서 길을 여는 상두소리

 

어룽진 4월을 지나는

가시 박힌 흰 손들!

 

 

4월

 

 

부고장이 올 때면 사립문에 꽂아뒀다

버드내 송 상가 부고 앞에

문맹이었던

그 눈길, 지네 닮은 글자들

건너는 지 저릿했다

 

할머니 머리칼은 흰 닥종이 빛이었다

그 뒷머리 외젖가락 빗장이 질러졌다

집으로 들이지 못한 꽃이

길 밖에서 쏟아졌다.

 

 

이장移葬

 

 

장맛비에 윤오월이 오락가락 머물렀다

무덤 밑을 흘러가는 황천 가에 닿았다

업경(業鏡)을 들여다보는 중

흰 그림자 지나간다

 

약수(弱水)의 강기슭에 널배를 띄운 후로

손 없이 구부러진 어머니, 공달 맞아

그 마음 강 건넜다

어깨에 핀, 꽃-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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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권

1960년 전남 보성 출생

한국교원대 박사 졸업(1994)

신춘문예에 시조(1990 동아일보), 동시(1991 소년중앙), 시(1996 서울신문) 등과

신인상 평론 (1992 겨례시조) 당선

시집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일상들>

시조집 <햇살의 길>, <숨>, <호두껍질 속의 별>외

한국비평문학상 수상(우수상), 무등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