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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강현덕 시인 시집엿보기 등록일 2019.03.08 19:42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724

강현덕.jpg

 

단검

 

 

 

찟을 듯 서쪽 밤하늘 걸려있는 저 단검

 

깊숙한 뱃속에 숨겨놓은 나의 궁극

 

어쩌다 혀를 잃어버린 마지막 나의 언어

 

가장 깊은 곳의 단단한 뼈 한 조각

 

품어서 지켜냈던 시간들의 붉은 응집

 

초사흘 초승달로 뜬 잘 벼린 저 단검

 

 

 

소금그릇

 

 

 

수없이 죽었고 수없이 태어난 봄

한 번도 죽지 않아 다시 태어나지 않은 봄

사실은 우주에 닿아 있지

내게도 닿아 있지

 

어부의 아내처럼 머리에 소금그릇

연두를 저장해 내게 또 건넬 테지

얼음길 걸어갈 때도

설렘을 앞세울 테지

 

반짝반짝 소금그릇 닦고 있는 사람아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스며들어

절대로 떠나지 않을

봄 같은 내 사람아 

 

 

 

포플러

 

 

 

세공사가 틀림없다

황금빛

저 손바닥

 

얕은 지문 촘촘히

박혀있는

금가루

 

바람에 손 비빌 때마다

휘날리는

저 찬란

 

 

 

나팔꽃

 

 

 

햇빛의 농담은 처음부터 언짢았다

새들의 긴 조롱도 갈수록 거북했다

해 뜬 후 마음의 절반

저절로 오그라졌다

 

모질기도 하여라 후두를 찢은 바람

시퍼런 핏덩이를 기어이 뽐아냈다

노래에 묻은 핏자국

선명한 요절의 예감

 

절명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오전도 겨우 아홉 시 풋감 하나 떨어지고

신문은 한 젊은 가수의 부음을 전해왔다

 

 

 

낮달

 

 

 

슬리퍼를 끌면서 공터에 나와 있다

 

낮 내내 먹은 게 없어 속이 텅 비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공터는 너무 넓다

 

 

 

먼저라는 말

 

 

 

이윽고 어둠이 풀려 아침이 찾아왔다

밤새 지붕 위 웅크렸던 송이눈

이제 막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떨어진다

 

퍽, 하고 눈 그림자 눈 보다 먼저 떨어진다

마음부터 먹고 보는 오래된 습관은

어디든 마음부터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그도 그림자부터 내게 온 것이겠다

수많은 먼저가 그림자로 짙어질 때

가장 큰 마음 하나가 성큼 발을 내딛은 것

 

 

복제

 

 

떨어져도 사과는 슬퍼하지 않는다

 

제 몸 깊숙한 곳에 저를 심어 두었으니

 

비탈진 시월 과수밭

 

다시 가득 채울 테니

 

 

 

강설降雪

 

 

 

누가 이 늦은 밤 고해를 하는 걸까

 

성당 뒷마당에 빈 가지 무화과나무

 

회백색 떨리는 입술 하늘에 닿는 통회

 

조금씩 내려 오는 하얀 자비의 말

 

쌓아서 지워내는 따뜻한 용서의 말

 

덩달아 순백이 되는 이 깊은 밤 나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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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

1994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 작품상,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수상

 시집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첫눈 가루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