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검
찟을 듯 서쪽 밤하늘 걸려있는 저 단검
깊숙한 뱃속에 숨겨놓은 나의 궁극
어쩌다 혀를 잃어버린 마지막 나의 언어
가장 깊은 곳의 단단한 뼈 한 조각
품어서 지켜냈던 시간들의 붉은 응집
초사흘 초승달로 뜬 잘 벼린 저 단검
소금그릇
수없이 죽었고 수없이 태어난 봄
한 번도 죽지 않아 다시 태어나지 않은 봄
사실은 우주에 닿아 있지
내게도 닿아 있지
어부의 아내처럼 머리에 소금그릇
연두를 저장해 내게 또 건넬 테지
얼음길 걸어갈 때도
설렘을 앞세울 테지
반짝반짝 소금그릇 닦고 있는 사람아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스며들어
절대로 떠나지 않을
봄 같은 내 사람아
포플러
세공사가 틀림없다
황금빛
저 손바닥
얕은 지문 촘촘히
박혀있는
금가루
바람에 손 비빌 때마다
휘날리는
저 찬란
나팔꽃
햇빛의 농담은 처음부터 언짢았다
새들의 긴 조롱도 갈수록 거북했다
해 뜬 후 마음의 절반
저절로 오그라졌다
모질기도 하여라 후두를 찢은 바람
시퍼런 핏덩이를 기어이 뽐아냈다
노래에 묻은 핏자국
선명한 요절의 예감
절명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오전도 겨우 아홉 시 풋감 하나 떨어지고
신문은 한 젊은 가수의 부음을 전해왔다
낮달
슬리퍼를 끌면서 공터에 나와 있다
낮 내내 먹은 게 없어 속이 텅 비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공터는 너무 넓다
먼저라는 말
이윽고 어둠이 풀려 아침이 찾아왔다
밤새 지붕 위 웅크렸던 송이눈
이제 막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떨어진다
퍽, 하고 눈 그림자 눈 보다 먼저 떨어진다
마음부터 먹고 보는 오래된 습관은
어디든 마음부터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그도 그림자부터 내게 온 것이겠다
수많은 먼저가 그림자로 짙어질 때
가장 큰 마음 하나가 성큼 발을 내딛은 것
복제
떨어져도 사과는 슬퍼하지 않는다
제 몸 깊숙한 곳에 저를 심어 두었으니
비탈진 시월 과수밭
다시 가득 채울 테니
강설降雪
누가 이 늦은 밤 고해를 하는 걸까
성당 뒷마당에 빈 가지 무화과나무
회백색 떨리는 입술 하늘에 닿는 통회
조금씩 내려 오는 하얀 자비의 말
쌓아서 지워내는 따뜻한 용서의 말
덩달아 순백이 되는 이 깊은 밤 나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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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
1994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 작품상,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수상
시집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첫눈 가루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