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1987년 예술계 문화예술비평상 당선.
2004년 시조문학 당선.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집 꽃의 약속, 화인, 바람의 내력.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한국문협작가상, 한국수필문학상, 연암문학상 대상,
울산문학상, 울산시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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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서 밀양까지
해발 구백 미터 간월산 고개 넘어갈 때
등짐 진 채 쉬었다는 장꾼들의 선짐이질등
나는 왜
아닌 벼랑 아닌 짐꾼에
못 벗고 선 오늘인가
칸나
본시 내 울음은 저 불 속 칸나의 것
마른 입술 깨문 채로 또 다른 불에 닿는,
못 지울 상처의 꽃인 것 울컥대는 내 목숨은
이 고요 속에
저만치 나가앉은 돌은 또 돌로 앉고
칼로 베지 못한 물소리만 흘러와서
내 뼈의 마디마디를 이 고요 속에 꺾는다
간절곶
내 생애 첫 햇살도 저리 붉게 왔을까
차라리 눈부셔라 어머니 단속곳에
탯줄을 끊어낸 아침 핏빛 속에 나를 안고
명줄을 잡아당겨 활을 긋는 순간이다
토할 것 다 토하고 삼킬 것 죄다 삼켜
바다도 산천도 들끓어 출렁이는 첫 울음
돌이나 삶아 먹고
쌀알 같은 싸락눈이 댓돌 위에 내리어서
누구도 알지 못할 내 남루의 시린 등에
차고도 슬픈 별 하나 홀로 업고 허청댄 밤
어둠인 내 안에서 돌이나 삶아 먹고
풋잠 든 새벽녘의 꿈이면 또 꿈이라서
꽃 지고 잎 진 다음에 벽을 안고 돌아눕지
운다고 울어지더냐
벼루에 먹을 갈듯 감추어둔 어둠을
운다고 울어지더냐 말 다 할 수 있더냐
이 적막 생솔로 타는 밤을
네가 왜 우느냐
설령 어느 비탈에 사랑 두고 왔대도
나처럼은 말거라 울음 울지 말거라
질러 온 짧은 봄 허리
물러서지 말거라
꽃 다 진다 잎 진다
삼월도 새물 냄새 흩적삼 갈아입고
뜨거운 시간 번져 잎이며 꽃 되기까지
천천히 당기는 몸빛
늦추지 마라 꽃 질라
덩달아 바빠졌다 한 치의 양보 없이
갚지 못할 빚을 얻어 햇볕을 사서라도
얼었다 녹았다 하다 담벼락을 헐겠다
콩을 사서 콩을 볶듯 다시 또 봄은 오고
휘늘어진 버들가지 불어온 그 바람을
혼자서 어이 막을까
꽃 다 진다
잎 진다
그런 날
분꽃 자리 그 아래 씨앗 주워 모으던
부끄러운 두 손을 봄빛 속에 펼쳐들고
바람도 먼 길 끝에서 흙을 굽는 그런 날
들찔레를 그리다가
진 날 갠 날 없이 들찔레를 그리다가
묵정밭 갈아엎은 속살이 뜨거워라
온 들을 득달같이도 넌출대고 출렁대니
그 천출 무지렁이 비린 피내림이여
회돌아 들물 날물 시름이야 깊든 말든
꽃 다 진 봄빛 사이로 속절없이 번진다
여인의 시간
부러진 칼날 끝에 날것의 욕망 끝에
울부짖는 피를 달래 잠재우는 여인 있다
아직도 수직인 바위, 손바닥엔 손금 있다
그날도 오늘처럼 숨 막히는 밤의 허리
온몸에 칼금 긋는 버린 봄날이 있었던가
이제나 저제나 정 붙인 인연살이
제 몸을 퉁소 삼아 울어도 보고 싶다
애끓는 몸말에까지 그 지문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