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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연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를 졸업. 1980년 《시조문학》 등단. 시집 『빈들의 집』 『서역 가는 길』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 시선집 『저 혼자 꽃 필 때에』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꽃벼랑』, 일역시집 『꽃벼랑』 등이 있음. 〈한국시조작품상〉〈이영도문학상〉〈유심작품상〉〈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현재 국제시조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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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의 노래
그 어떤 칼날로도 너를 열 수가 없어연한 소금물 속에 가만히 담가놓았지세상의 이슬방울 속에 노래를 담가놓았지
송광사의 저녁
범종은 하늘가에 수묵을 풀어놓고
법고는 구곡간장에 정적을 풀어놓아
몸 안의 나를 파내었다
찌거기를
마구
내편
술추렴 끝났는지 조용해진 산창에깊은 소온 물소리성큼, 다가앉고맑은 달 귀를 기울여 다정히 떠오는 밤일만 달빛 금물결 아득타 누웠으니인생, 뭐 있다고바글바글 들끓던머릿속 좀들이 기어 사방에 흩어지누나
지문 指紋
너도 지금 달을 봐 나도 볼게 하며 보던
그 하늘 끝자락엔 눈 지문이 묻었겠지
너에게 묻은 마음은 지울 수도 없겠지
노을이 지는 저녁에
저 산은 우러르며 하루의 꽃을 바치는데
무릎 끓어 꽃 한 송이 바쳐보지 못하고
가을이 벌써 깊어서 수풀이 비어가네
한 아름 들국화를 가슴에 품었어도
전할 수 없는 향기만이 들끓어 속 타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고 하늘이 어두어 오네
분리수거
나는 점점
나로부터
빠르게 격리된다
유리
캔
플라스틱
비닐로 해체된다
조만간
나는 나에게
완전히 배출된다
밤의 갈매기
은은한 달빛 아래 물고기도 잠든 바다
이 먼 수평선에서 저 먼 수평선으로
암청색 밤하늘을 비행하는 갈매기를 보았다
온몸으로 치솟고 온맘으로 미끄러져
먹이로만 살지 않는 갈매기를 본 적 있다
춤추며 저를 드러내는 선이 하얗게 피어났다
봄바람 꽃다발
맨 처음의 인류가 무덤가에 놓았던
진달래꽃 한 다발을 오늘도 놓아보며
너무도 오랜 허무를
손 내밀어
더듬다
내 마음 좁다 하며 부딪고 부서지면
눈보라 녹아들고 봄빛이 눈부시면
봄바람 꽃다발 들고
홀연히
이끌려가다
아는 가을
똑똑한 줄 알았던 어린 봄을 보내고
잘나가는 줄 알았던 젊은 날을 보내고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아는 가을이다
눈 오는 저녁의 시
어둠에 눈이 깊던 맑은 날들을 길어 내 언제 저렇도록 맹목을 위해서만 저무는 너의 유리창에 부서질 수 있을까 무섭지도 않으냐 어리고 가벼운 것아 내 정녕 어둠 속에 깨끗한 한 줄 시로만 즐겁게 뛰어내리며 무너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