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
봉정사 극락전에서 / 광릉 크낙새 / 철거지대 / 닭둘기 / 춘분 무렵 / 봄을 세일합니다 /
자구내 해넘이 / 독도 시편 / 축제의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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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극락전에서
극락이 있다길래
극락전 보러 갔지
극락을
빌러 온 사람
극락전 뜰에 줄을 섰네
극락도 만원이구나
극락 가긴
영 글렀네
광릉 크낙새
퇴락한 왕조사가 낙엽 아래 몸을 묻네
무덤가 잔디마저 머리가 센 세상읠 뒤꼍
노을에 제 살 태우는 가을이 익어가네
밑동 잘린 갈참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누군가 뚫어 놓았을 구멍 하나 우러른다
깊은 속 가늠 못하는 그 내밀한 둥지를
바람도 이쯤에선 무슨 말이 하고픈 게다
정사도 야사도 아닌 철 지난 소문들을
온 숲에 사발통문처럼 다문다문 풀어놓고
묘비명에 쪼아 새긴 실록의 한 자락을
크낙새 부리 끝에서 더듬어 찾는 동안
못다 운 왕조의 울음 크낙크낙 울려오네
철거지대
뉴타운 현수막 아래 엎드린 몇 채 집들
까치마저 떠나버린 먼지 쓴 전깃줄엔
마지막 몸부림인 듯 빨래가 나부끼고
풀기 없는 낯빛으로 아침을 끓이는 아낙
코흘리개 재워놓고 갓 돌아온 노래방에서
간밤엔 누굴 끌어안고 희망가를 불렀을까
불도저 엔진 소리에 다리 풀린 하루가 간다
쨍쨍한 대낙에도 서둘러 저무는 하늘
천국은 큰 교회 첨탑 그 끝에만 있나 보다
닭둘기
야윈 목에 말라붙은 허기진 햇살 한 점
지난밤 토사물에 뭉툭한 부리를 씻고
비상의 죽지를 접은 절름발이 하루가 간다
온종일 시린 맨발, 어디를 디뎌야 하나
보도블록 깨진 틈새 하데스 허방 같은
풀 냄새 사라진 땅에 제 이름을 묻는다
잿빛 도시 어디에도 깃을 털 숲은 없다
둥지마저 철거당한 무허가 노숙의 나날
무심한 눈빛에 찔린 가슴이 또 아리다
그믐밤도 달이 뜨는 빌딩 숲 불면의 밤
누울 수도 설 수도 없는 난간 아래 홰를 치다
동트는 새벽 어귀에 닭 울음을 토한다
춘분 무렵
불임의 한 여자가
양수 왈칵
쏟고 있다
실핏줄 도드라진 계곡,
진달래 꽃술마냥
몸 풀자
발정 난 대지
다, 다, 다산이
시작된다
봄을 세일합니다
표는 또 매진이다,
한 뼘 접은 치마 위로
선웃음 한 꾸러미 찾잔 속에 포개 들고
모텔 방 늘어선 골목,
시간을 배달한다
얼룩진 쟁반마다 낮밤 없는 비린 살내
앞섶 푼 여런 꽃잎 뚝뚝 지는 난장에서
생무지 장꾼의 하루,
두 볼이 홧홧하다
몸만 달뜬 불협화음 이중주를 훔쳐 보다
마디 큰 신음에 섞여 흐늘대는 지폐 몇 장
갓 스물 쪽방 가슴이
황사비에 젖고 있다
자구내 해넘이
머리 푼 구름들이 먼 하늘로 타래 친다
갈지자 높바람에 메밀곷 핀 포구 너머
흉어기 저녁 바다가
속 빈 매운탕을 끓인다
아흐레 멀미에 지친 차귀도도 드러눕고
거품이 거품 물고 부침하는 냄비 해안
가슴에 구멍이 뚫ㅇ\린 돌덩이만 그득하다
장기부채 고봉밥에 더 허기진 수월봉엔
간신히 수저를 든 창백한 낮달이 홀로
고수레, 고수레하며
별빛 가만 뿌리고 있다
독도 시편
하늘도 내 앞에선 낯빛 고이 가다듬네
메밀곷 핀 난바다에 삼각파도 드높을 때
동트는 수평선 위로 창검을 벼리는 섬
쇠비름 박주가리 납작 엎딘 바위틈엔
참억새 마른 대궁 바람에 맞서 있다
푸른 빛 다 스러져도 잎에는 날이 선다
햇살 바른 앞가슴께 둥지 튼 슴새 떼가
애오라지 물어오는 물 소식 한 토막에
느꺼워 목 메인 날은 휘파람을 날리고
백두의 말석에서 지켜 온 직립의 결기
일란성 오뉘라서, 홀이 아닌 둘이라서
샛바람 치대는 밤도 외롭지는 않겠다
축제의 끝
바람
바람이 분다
이제 그만 떠나야 한다
열흘 치 립스틱을 닦는 꽃들의 늦은 오후
황금빛 자오선에도 어스름이 내린다
축제의 마지막은 폐비처럼 처연하다
화장 지운 민낯으로 봇짐 싸는 가지 사이
삽시에 장막을 치며
불쏙 솟는
초록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