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이명/ 먼지의 집 / 가을 저녁 / 난蘭의 겨울 / 늙은 길 / 쇠물꽃 / 가시연꽃 /
흰색의 배후 / 사발면 / 맷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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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밤이면 귀에서 자꾸 소리가 나는데요
바람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요
의사가 귓속을 본다
미궁에 빠졌군요
우울한 냄새들도 가끔씩 나는데요
그럼요, 잡념이 괴면 고요조차 썩어요
쉬세요 내려놓으세요
그 곳도 길입니다
먼지의 집
장롱 겨드랑이에도 먼지가 늘 자란다
매일 닦아도 먼지는 숲을 이루고
조금씩 그녀이 삶도
그 속으로 쌓여간다
바람에 부풀어 터진 지칭개 꽃처럼 눕는다
하루를 빨아들인 하루의 무게만큼
오늘도 단단히 누워
먼지의 집을 짓는다
가을 저녁
저녁녘 먼 길에서 날아온 친구 소식
근근이 풀칠하던 멍에에 목맸다고
소랭한 거미줄마다
찬바람이 일어온다
그의 젖은 삶이 자자히 깊어지고
돌아온 길들과 아직 남은 먼 길들
슬픔의 거친 파동에
나뭇잎이 떨어진다
오래된 서랍 속의 기억을 뒤적이다
지상에 남겨진 몇 개의 편지들을
바람 편 들길우체국에
쓸쓸히 부쳐본다
난蘭의 겨울
1.
마루 위 난 그림자 헛뿔리를 내린다
흰 꽃이 머문 자리 정적같이 은미하고
물길을 안고 자란 듯
구불구불한 뿌리들
2.
돌 틈으로 삐죽이 빠져나온 흰 발톱들
물을 주면 바스스 타 들어가는 소리
얼마나 오래 참았을까
날개마다 돋는 초록들
늙은 길
머리에 인 붉은 다라 팔다 남은 옥수수
질긴 그령풀에 발을 자구 놓칠 때
가던 길 길 위에 두고 언덕처럼 앉아있다
저녁 해는 저벅저벅 집으로 내려가고
나무도 서두르는 듯 온몸을 뒤튼다
길들도 떠날 채비하듯 굼실굼실 움직인다
퉁퉁 불은 신발 따라 먼 길이 이어지고
마음자락 매달린 총총한 어린별들
어머니 주름진 길도 서둘러 걸어간다
쇠물꽃
수만 송이 철꽃들이 용광로에 피어나고
심해의 꽃불에서 날개 돋는 푸른 나비
모루 위 길게 눕혀져 허물을 벗는다
찬물에 푸르륵 온몸을 담금질하고
하늘 보고 치고 접어 별 보고 치고 접어
입춘녘 단단한 몸으로 환생하는 쇠물꽃
갓 나온 풀잎처럼 파도 문양 어우러진
더운 기 아직 남은 불꽃바람 기억들
달군 쇠 다시 벼리는 망치소리 드맑다
가시연꽃
집나간
엄마 길은
비린내로 들끓었다
늘 젖어
목까지 찬
아이의 분노지수
활화산
자기 몸 뚫듯
가시가시 피운다
흰색의 배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해서 춥다하고
색색의 소리까지 흰색에 갇혔다며
꽃들의
본색만 찾아
아름답다
수군댄다
사과는 빨갛다는 고집스런 집착 속에
총알 한 발 놓는다 중심 뚫고 지나가듯
의미가
파편들 속에
흰색이라
읽는다
사발면
정자에 쭈그린 채
한 노숙이 자고 있다
이불 밑 못 들어간
고아 갚은 두 맨발
웅크린
가로등불이
추운 잠을 지킨다
경계하듯 날 세운
앙상한 어깨 위로
오고가는 눈길만
따갑게 훑고 간다
먹다 만
사발면 줄기
꿈틀, 돌아눕는다
맷돌 이야기
아무렇게 굴러다닌 노란 푸른 콩알들
이놈의 콩 아까워라 못난 콩 줍던 노모
그 모두 갈아 내놓던 맷돌이 아직 있다
식용이 왕성했던 아이들의 주린 배를
참 많이도 먹여주고 채워주던 저 맷돌
지금은 고요와 정적만 구멍에 가득하다
낡은 그리움을 소리 없이 갈고 있는
그 사이로 쏟아지는 비릿한 고픔들
어디서 햇빛 콩알들 튀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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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희
청원 출생.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