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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배경희 시집 <사과의 진실> 등록일 2022.09.26 15:36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56


사과의 진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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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희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경기대학교 대학원 한류문화콘텐츠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흰색의 배후>가 있으며, 2020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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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DNA


칠판을 긁었다, 날카로운 금속성

뇌 속에 인지되는 저 비명이 나는 싫다

거대한 공룡이었을까 몸을 숨기고 있나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게 틀림없어

먼 옛날 혹시 나는 고라니 염소였을까

내 몸속 기억하는 것, 강한 것의 두려움들

연둣빛 풀들 사이 검은색이 꿈틀한다

천년의 고요를 심장 속에 감추었나

한겨울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붉어진다



당신의 고요



물속의 꽃다발을 지그시 누르면
떠오르려 발버둥을 치는 꽃 이파리
더러는 물에 잠기기도 해
그것은 상처야

천천히 바닥으로 깊이 가라앉을수록
얼굴이 사라지고 바람도 날아가지
봄날을 살풋 두드리던 요일이 지워져가

탁한 물병 속에서
꽃잎은 조용했어

침묵을 앓았던 무의식 인형들이
창문 밖 약국에 가면 우르르 쏟아지듯

상처도 유기체야
익숙해진 어둠처럼

당신의 고요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의사는 붉은 열매를 먹으라고 처방했어





그녀의 집



대중탕을 다녀온 후 은밀한 가려움

델 정도 식초 물도
소용없는 환각의 집

불안과 두려움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

병명을 채집하는 고문 같은 오 분 동안
그녀는 추론한다 기억이 오래됐다고
집안이 냉골이네요 얼음이 박혔어요

햇볕을 장기간 복용해야 합니다

기억의 암실도 노출이 필요하듯
그녀의 시든 잎잎에 연둣빛을 높여요





멜랑콜리 음악을 듣다




백일홍이 한꺼번에
기억 속에 떨어지고

꽃잎이 귀 끝에서 파르르 소름 돋듯

수많은 순간이 몰려와 슬픔이 뜨거웠다

그때의 너와 나는
방향을 몰랐던 거

우울도 향기 나고 어둠도 희었지만

음악 속 어느 골목에서 우리는 떠나왔다




장미의 서랍



장미의 향기는 열어놓은 서랍이에요

겨울에 쏟아놓은 얼굴들의 붉은 화장

꽃들의 공동체적인 번뇌일 뿐인 걸요

이해하지 못한 꽃들은 아래로 내려가요

진흙탕에 빠지고 얼룩을 남기지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우리는 살아야 해요

뜨거운 여름날 단내 나는 향기 속에

쾌락은 부정도 아닌 한계에 도달해요

우리는 피투성이로 마지막 분신을 해요



흰색의 저항



풀밭이 시끄러워 문을 다 닫았다

흰 눈이 쌓이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설픈 문장에
사과꽃을 그렸다

세상 모든 꽃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흔들리고 쏟아지는 모든 것을 삼켰다고

문장이 종일 울었다
유년은 흰색이었다



기린이 있었다



어둠의 통조림에 익숙해진 가족들

토마토, 오이가 어려워진 식탁에서

기린이 필요하다고 아버지는 늘 말했다

식물을 부정하는 내 안의 검은 피들

피 끓는 사자가 흰 기린을 뜯어먹듯

식탁 위 식물의 순응에 반기한 검은 욕망

육식의 의자에서 어둠의 커브에서

체제가 깨지고야 눈에 들어온 구름 계단

등 뒤로 잎 하나 자라나, 목이 길어진다



우리의 카르텔



우리는 일 퍼센트
흰 튤립을 갖고 있어

아무도 못 건드려 꽃병들은 아주 많아
시소는 평등했다고 우겨대도 그들은 몰라

펄펄 끓은 국물을 공기대접에 넣고는
차갑다고 말해도 신처럼 그냥 믿어

결말은
무조건 화이트

눈 가리고 야옹은 쉬워

지금도 초콜릿을 못 잊는 이들은
그 시절이 좋았다고 너무 쉽게 등을 보여

우리는 살아있는 의자야 역사도 그래 왔어



실종



동생이 사라졌다 집안이 뒤집혔다
죽어라 이십 년을 찾으러 다닌 아빠
엄마는 집에 나간 후 시간이 멈추었다

과거형인 오늘과 현재형인 어제가
한 울타리 안에서 조용히 번뜩였다
단서가 단서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맸다

모래폭풍 한가운데 들어앉아 늙어가는 집
오히려 죽었다면 잔인할지 모르겠어
지금이 없는 현실에서 숨을 못 쉬겠어


일상을 갖고 싶은데 기억은 늙지 않아,
같은 시간 속에서만 눈빛이 달라졌다
창문은 내내 투명했다 후일담만 남았다



사과의 진실



한꺼번에 쏟아지는
거울 속 풋사과들

못 참겠어 푸른 것도 빨갛다고 생각해
안과 밖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실인 듯

뉴스도 신문도 사람도 다 튀어나와
하루 종일 입에서 검은 똥을 줄줄 뱉어요
항문은 양심적이라고 변기가 말했어요


그래도 생각해요,
사과꽃의 고요를

가을은 가을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사과는
사과꽃 향기를 잊지 않고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