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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강경화 시집 <나무의 걸음> 등록일 2022.12.17 17:25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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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광신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 졸업
1999년 <금호문화> 우수상
2002년 <시조시학> 신인상
2013년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작품상
2019년 무등시조문학상
시조집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한다>, <메타세콰이어 길에서>
오늘의시조시인회의, 광주광역시문인협회, 율격동인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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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바람들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맞은편 문이 열리고

은행나무 침대 밑으로 봄바람이 들었다

여기에 떠도는 것이 오래된 먼지뿐일까

들키고 싶어 내던져둔 어릴 적 일기처럼
깊고도 캄캄한 곳에 표류하듯 쌓인 먼지
바람에 떠밀려 나와 하염없이 부유한다

내게 닿는 너의 말은
답을 잃은 반향어

그 쓰라린 의미를 알고 싶은 날들이



물살


홀리듯 닿은 계곡
굳은살 박인 발을 담근다

작은 돌이 순간 물 밖으로 튀어나온다

별안간 뒤집힌 생이
연둣빛으로 반짝였다

흘러온 기억이
햇살에 데워진다

순탄한 물결과 긁힌 생이 덜컹 만나

다리를 훑고 흐른다
귀까지 젖는다


나무의 걸음


어둠을 삼키며
나무가 걸어온다

온전히 묻히지 못해
뿌리는 항상 까치발

차가워 온기 한 줌 찾아
더듬더듬 길을 간다

생의 줄기 밀어내어 한 발씩 내딛는 일은
앞서 내린 뿌리를 독하게 끊어내는 일

제 상처 덧나지 않게
제 잎 떨궈 덮는다

맘과 달리 뻣뻣해진 몸
가면 갈수록 푸석거려

닦지 못한 눈물이
하얗게 흩날린다

뿌리는 상처를 끌고

발맘발맘
내게 온다


걸레질


햇살 비친 방안 가득 잡지 못할 먼지가 떠
걸레를 움켜쥔 채 허리를 구부린다

바닥을 닦는 시간만큼
굳은살 박이는 무릎

어머니의 묵은 기억을
뒤집어가며 닦는다

아무리 문질러도 흐릿하게 남는 흔적

그녀가 뱉지 못한 말이
얼룩얼룩 배여있다


그늘이 잘린 자리


아버지 봉분 위로
그늘이 지지 않도록

백일홍 새 가지 뻗는 족족 쳐내는

거친 손 견디지 못해 나무는 물을 끊었다


피다만 붉은 꽃이
가지 끝에 달려있다

하늘 끝 낮달이 희미하게 떠올라도

풀 돋을 흙 한 줌 없이

마른 그늘 되고 있다


마음이 마음에게


물병을 잡은 그가 잔에 물을 따른다

기울인 만큼 채워지는 잔
꼿꼿해서는 흐를 수 없다

마음이 마음에게
흐르는 길도 그렇다

물병을 잡은 그가 잔마다 물을 따른다

누구에겐 한 모금
누구에겐 넘칠 듯이

따르다 쏟아버린 마음은
꾹꾹 눌러 닦아낸다

물병 속에 아무리 맑은 물이 가득해도


손가락을 앓다


검푸른 손톱 위로
붉은 비명이 터진다

아물던 상처에 걸린 실오라기가 퍼 올린 소리
아무리 입 앙다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찬찬히 당겨보는 저편의 기억들

물끄러미 쳐다본다
숨어있는 반 달 한쪽

손끝에 차오르지 못한 달

차오른 적 없는 그대


헐거움에 관하여


오른발보다 반 치수 정도
헐거워진 왼발

기울어진 길처럼
치우쳤던 생각들

왼발의
헐거운 기억

뒤꿈치부터 닳는다.



깡통의 깊이


다리의 흉터가 금어초처럼 찍힌 사내
동전 하나 담기지 않는 빈 깡통 앞에 놓고
육교를 오가는 신발
힐끗힐끗 보고 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금빛 물고기 걸리기를

뻣뻣해진 다리를 꾹꾹 눌러 주물러도
그 자리 푹 꺼진 낮달처럼
쉬 차오르지 않는다


길 위에 떨어지는
소리를 찾는 일처럼

바닥을 보는 일은 아리고 아파서


시월 벚꽃


봄날에 피었던 진분홍 꽃이 또 찾아왔다

예기치 못한 만남 앞에
왈칵 물드는 마음

가을날

그대도 기별 없이

내게 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