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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이태정 시조집 <빈집> 등록일 2022.12.29 19:39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40

빈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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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정

2012년 《유심》으로 등단했다.
2012년 전태일문학상,
2018년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2020년 서울문화재단에서 창작 지원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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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붉게 녹슨 철문이 겨울처럼 잠긴 집은
적막이 자라기에 알맞은 습도로
자꾸만 표정을 잃어가며 무너지고 있었다

고리 빠진 문 사이로 바람만이 드나들고
나란히 앉아 있는 뒤란의 장독들은
쓸쓸한 기다림으로 곰팡이를 피웠다

우리가 한때 장독처럼 나란했던
그 시절을 불러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웅크려 앉아 있으면 따뜻해질 수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단념으로 단단한 집
거미 혼자 부지런히 집을 짓고 진을 치는
무성한 바람과 잡초만이 이 집의 내력인 집




돌 하나 올려놓고


마음은
내려놓습니다

돌과 돌이 껴안으며

기도처럼 뜨겁습니다

간절한 모든 것들은

저렇게

쌓이나 봅니다


누수


며칠째 화장실 세면대가 새고 있다
낡은 배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들
어머니 마른 뼈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미소 잃은 벌어진 입가에
뜻 모를 옹알이와 침이 흐를 때
한생이 아랫도리 적시며 주책없이 새고 있다

새는 것이 이토록 뜨거운 줄 몰랐다
어금니를 깨물며 녹슨 몸을 닦는데
울음보 터트리면서 오늘은 내가 샌다


종로3가 1번 출구


두꺼운 화장발과 몇 살 적은 나잇발로
가끔은 머리끄덩이 잡았다가 잡혔다가
결국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도심 골목

소란이 끝난 뒤 찾아온 협상 시간
예사롭지 않은 시선을 건네며
한 마리 나비로 다가가 전하는 한마디

"같이 가, 잘해 줄게, 저 따라오세요."
어쩌면 간절했을, 밥벌이 구호였을
노동의 적나라함으로 벌거벗을 수 있다는 말

나란히 어깨 감싼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세상 모든 쓸쓸함이 머무르기 좋을 만한
네온 빛 몽롱하게 돌아가는 후미진 골목 안쪽

폐사되기 전까지 웃으면서 살기 위해

눈웃음 띄우며 옷매무새 가다듬는다

덧바른 립스틱처럼
덧칠하는
생의 한때


꽃 질 무렵


종일 누워 계시는 노모의 목욕 날
앙상한 뼈마디 사이사이 내려앉은
저승꽃 만발한 몸에 물을 적신다

송이송이 잔뜩 물을 머금었다
물안개 피었다가 사라지는 순간처럼
사르르
사라져 가는
생의 시간들

거친 숨 몰아쉬며 물속에서 나오면
오늘도 저물녘
하루가 지고 있다

또르르
이부자리에
꽃이 눕는다



괜찮은 일


저물도록 캄캄하게
울고 난 뒤 깨달은 건
부지런히 성실하게 그 슬픈 것들과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오랫동안
환해지는 일


위안


어둠에도 오랫동안 눈빛을 보내면
환하게 답장 보내올 때 있다는 걸
반지하 계단 모퉁이
풀꽃에서 읽고 있다

괜찮아, 지낼 만해 가끔 바람 불고
때로는 눈물 나고 시린 날도 있잖아

나를 봐, 
나도 이렇게
꽃 피우고 있잖아


투병


이제부터 내게 함부로 하지 않겠다
나를 온전히 내 것이라 하지 않겠다
그동안 아무렇게나 팽겨쳐서 미안하다

정중히 물어보고 오롯이 보듬으며
고운 눈빛으로 꽃처럼 살피겠다
원해서 함께한 일 아니라도 사이좋게 나란히


도시의 가마우지


급하게 먹은 아침 생목이 오르지만
오늘은 넥타이를 더 바짝 조인다
한 치도 느슨해질 수 없는 도시의 출근길

어제보다 더 깊은 강바닥을 잠수해서
날쌔게 먹이를 근근이 낚아지만
온전히 삼킬 수 없는
내 것 아닌 내 것들

외상값 장부처럼 늘어난 고지서와
채워도 마이너스 잔고인 통장뿐

게워도 게워 내어도
게울 것 없는
빈껍데기


헛배


정규직 비정규직 등 돌리고 앉은 식당
일용직은 혼자 먹는 아름다운 점심시간
눈칫밥 식판 가뜩히 꾹꾹 눌러 담는다

모래 같은 밥알은 곱씹으며 다짐해도
내일은 오늘보다 달라질 게 없을 거야
내일은 내일 돼봐야 알 수가 있을 거야

오늘은 오늘이 하라는 걸 하기만 해
미래를 생각하면 체하고 말 거야
언제나 소화되지 않아 헛배만 부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