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애영
목포 출생. 2010년 《시조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정형시집 『모서리 이미지』, 『호루라기 둥근 소리』, 『종이는 꽃을 피우고』, 시집 『나의 첫 사과나무에 대한 사과』, 공저 『한국해양문학상수상작품집』 발간. 제4회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 제5회 백수신인문학상, 2020 한국여성시조문학상, 제26회 한국해양문학상대상 수상. 2020년 인천문화재단문학창작지원금(시),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학창작지원금(시조) 선정. ---------------------------------------------------------------------------
성배聖杯처럼 돋아난 화석
웰위치아* 맨살 속엔 첼로 소리가 새겨 있다 저항도 장식도 없이 눈물처럼 싱싱한 하늘 눈 가닿고 싶은 풀벌레 선율도 담고
사막을 가로지른 거대한 두 개의 잎 사마리아 여인의 울음을 잠재우듯 마주 본 별과의 수수만년 성배聖杯처럼 돋아난다
* 나미비아 사막의 고생대 식물.
코피노*가 등장하는 무대
땅콩을 팔고 있는 13살 라이언 제이 아픈 어머니 대신 가장의 역할이다 속울음 머금고 있는 엑스트라 표정 같다
바콜로드 빈민촌에서 우물물을 기르고 내 성은 코피노예요 당당하게 외친다 슬픔이 자꾸 길어져도 내일 향한 오늘일 뿐
아직도 매달려야 할, 하루 치 아득한 분량 손끝에 부르튼 이방異邦 그 끝을 잡지 못한 일용직 싱싱한 대사 파도의 벽 넘고 있다
*kopino :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필리핀 여성의 자녀.
빌레못* 진달래
아침에 떨어진 꽃잎 봄밤이 줍고 있네
그 동굴의 안부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면 속울음 켜켜이 품은 주상절리라 부르겠네
아름아름 피워냈건만 속수무책 짓밟힌 꽃
무자년 지나온 울혈, 몸이 몸을 돋우네 극한은 끝남이 아니라 더 뜨겁게 돋는 애채
하늘은 어느 못에 저 많은 질문 감췄을까 화덕과 깨진 무쇠솥 아이 안은 엄마의 유골
불 밝힌 저 풍등을 향해 달, 하나 옮겨보리
* 제주 4.3 유적지.
도서관
나무들은 흔들리며 소리를 복사한다
꽃잎들의 필사는 늘 나비의 일이기에
대출된 바람과 구름 페이지만 넘긴다
구석엔 칩거에 든 장자의 길이 있고
서책의 수천 문이 빼꼭히 꽂혀있는 벽
제목들, 눕지 못하고 삼동을 견디고 있다
견우성
허술한 거푸집 공약들이 난무하던 밤
마른 철쭉 물을 주며 견우노옹牽牛老翁을 생각했다
숨진채 꽃이 된 방호복 사람들 은하가 비추고 있다
소소한 울림에 관하여
1. 비
차창 위의 스타카토 씻김굿의 절정 같다 두 손으로 손사래 치는 와이퍼의 몸부림 온전히 살아간다는 것 차고 슬픈 방울 소리
2. 쉼
물숨은 숨이 아니지 멈춰야 살 수 있지 물안경 쑥 이파리 씹던 껌 뇌신 한 갑 버텨온 삼춘 숨비소리 맑게 뜨는 우도 하늘
3. 물
달맞이꽃 환히 두고 걸어가는 뒷모습 만해는 구름을 딛고 설악 무산霧山 마중 간다 백담의 물소리 남기고 벌레울음 걸머쥐고
소牛를 찾아간다는 것
지나온 걸음만큼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들이 피고 져도 아무런 화답도 없다
긴 봄밤 지고 간 몽돌 내 안의 비문이다
한밤의 네모 상자
자꾸만 쌓여가요 내 안의 무게들 난해한 비밀번호는 네모 칸을 자꾸 만들고 이제는 아파트로 부풀어 양어깨를 누르네요
급작스레 내쳐져요 과부하 읽지 못해 때로, 거꾸로 걸린 들꽃처럼 남겨져도 거절도 승낙도 할 수 없는 내 뇌리 속, 검은 사막
부동의 은유隱喩라도 신록은 찾아오지요 산수국 흩뿌려서 밀폐의 시간 드러내면 신새벽 창밖의 시어詩語 새들이 채록할까요
징소리
채끝으로 내리칠 때 자운영이 피었다
인왕산이 검게 울고 녹비로 채워졌다
융릉隆陵의 귀면와 누각 놋쇠달이 자랐다
*사도세자 능.
고흐의 가죽 나막신*
누가 신고 떠난 걸까 신발 속 쓸쓸한 무게 투박하게 접힌 결, 노동의 페이지인 듯 한 생의 발자국을 위한 저리 평평한 각도
귀에 갇힌 저녁별이 그대 옆에 누울 때 밀밭이 순간 환해지기도 했을 거다 달처럼 단단한 속살 새 울음도 다 받아 주는
풍차의 바퀴살로 휘도는 바람소리에 바닥과 굽의 중심, 키우는 걸 이제 알겠다 자갈길 뚜벅뚜벅 가는 이물이 없는 존재여
* 1889, 고흐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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