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말
  • 시조나라 작품방
시조감상실
  • 현대시조 감상
  • 고시조 감상
  • 동시조 감상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신춘문예/문학상
  • 신춘문예
  • 중앙시조백일장
제주시조방
  • 시조를 읽는 아침의 창
시조공부방
  • 시조평론
휴게실
  • 공지사항
  • 시조평론
  • 시조평론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임채성시인 시집<야생의 족보> 등록일 2022.03.16 13:21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94

임채성.jpg
---------------------------------------------------------------------------------------------------
임채성

경남 남해(창선도)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시선집 지 에이 피 가 있다. 
정음시조문학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신인상, 한국가사문학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21세기시조>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선녀와 나무꾼


스물 남짓 몸담았던 천상을 걸어 내려
SKY 졸업장 들고 빌딩 숲에 들어섰네
동화 속 날개옷 한 벌 투피스로 차려입고

그러나 하늘 길은 어디나 막혀 있었네
연싸움에 닳고 닳은 낙하산줄 하나 없인
돔 지붕 유리천장에 닿을 수가 없었네

어느 날 그녀에게 나무꾼이 다가왔네
여남은 번 도끼질에 날개옷은 찢겨지고
그렇게 엄마가 됐네, 명함 한 장 갖지 못한

창밖의 해와 달이 그림자를 키울 동안
깃 빠진 날갯죽지에 홰를 치는 신경통
끝끝내 승천의 꿈은 대물림으로 전하네


스타벅스, 스타벅스


사람들이 강물을 떠 마실 수 없게 되자
강이 점점 사람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일일구 사이렌 소리
한강대교를 질주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강을 보며 마주 앉아
머그잔과 생수병에 하루해를 담고 있다

사이렌,
초록 마녀가 물속에서 웃고 있다


18시 33분


단두대 칼날 같은 시침 분침 겹쳐지면

비명도 절규도 없이 선지피를 쏟는 하늘

잘려진 하루의 목이 빈 술잔에 떨어진다

목 잃은 좀비들이 헤매 도는 뒷골목엔

기름 솥을 뛰쳐나온 바삭한 닭 울음이

고층 숲 도시를 향해 홰치는 시늉을 하고

가로수 뿌리 틈새 월세 든 민들레가

청소차 매연 앞에 방독면 뒤집어쓸 때

취객의 구둣발 소리 어스름에 묻힌다


청동검의 노래


1.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뼈가 시큰하다
얼어붙은 산과 계곡 자갈뿐인 들을 지나
신탁을 따라나선 길 흙먼지가 자욱하다

2.
선지자 거울에 비친 바닷가 수정 동굴
검은 용에 붙들려 간 아사달의 왕녀 찾아
차디찬 동토의 대륙, 봄 다시 맞고 싶다

횟배 앓는 바람 소리 칼집에 갇혀 울 때
비파형 검을 덮는 이끼 같은 푸른 녹들
어둠의 역린을 찔러 용의 피로 씻으리라

3.
성전의 상처에는 거먕빛 꽃이 핀다
공주여, 용의 불길에 내 몸이 타거들랑

해 바른 고인돌 아래 검과 함께 묻어주오

그대 손이 어루만진 수의라도 입는다면
선사의 주술 뚫고 한 신화로 깨어나리
살 비린 피의 내력을 싹둑 끊은 전사로서


울돌목 노을


누가 또 피의 해역에 모닥불을 지피는가
애저녁에 속만 태울 좁은 물목 한가운데
무모도 저런 무모를
어짜자고
어짜자고

정유년 바다에도 불꾼 여럿 있었겠다
깜부기불 목숨마저 사릿물에 던져놓고
열세 척 쪽배에 올라
불섶 향해
가던 이들

불빛 핏빛 한데 엉킨 역사의 다비식장
환호성과 흐느낌이 밀썰물로 갈마들 때
남도 끝 개밥바라기
촛불 하나
밝혀 든다


절집 이야기


부처님 모신 불당을
왜 절이라 부를까요?

 불단 앞에 촛불 켜고 두 무릎을 끓은 다음 오른쪽과 왼쪽 팔을 나란히 땅에 대고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오체투지 절을 하고,
일어나서 두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려 가슴에 모아 쥔채 또 엎드려 절을 하고, 다시 또 일어나서 또또 절을 하고, 
또또또 절을 하고 또또또또 절을 해서 백 번에 여덟 번은 더해서 꼭 채워야 온전한 절 한 번이 끝난다는 예절의식, 
머리부터 무릎까지 구부릴 줄 아는 사람만 저들끼리 공손하게 절 나누는 절집이라서 그 이름도 절, 절이라 부르지요

금배지 절집 가자고 하면
고개 젓는 이유라지요


야생의 족보


내 피는 시나브로 바닷빛을 닮아간다

걸음발을 뗄 때마다
소금쩍이 이는 날들

바람에 눈을 맞추면 몸이 절로 들썩인다

반세기를 유랑해도 닿지 못한 섬이 있어

꿈속을 허우적대다
다시 쓰는 표류기

모비딕*, 그 전설을 아직 탈고되지 않았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e)의 동명소설에 나오는 흰 고래 이름.


달맞이꽃


달보드레한 저녁 길섶

한 여인과 마주쳤다

말을 걸까
그냥 갈까

얕은 어둠 주무르다

술잔 속 달을 마셨다

밤이 한 뼘 짧아졌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


2미터 거리 밖에 너를 두고 볼 수밖에
꿀을 빨던 입술에도 마스크가 씌워지고
손조차 잡을 수 없던 그해 겨울 꽃샘바람

도시 속에 섬을 짓고 동안거에 드는 이들
봄 지나 여름 가을, 꽃은 또 피고 져도
구급차 경광등 불빛 잠든 어둠 깨운다

체온 서로 수혈하는 꿈은 정녕 꿈이었나
링거 줄에 몸이 묶인 철제침대 시트 위로
불규칙 가르랑 소리 줄타기를 하고 있다


제주 동백


바람에 목을 꺾은 뭇 생령이 나뒹군다

해마다 기억상실증 도지는 봄 앞에서

상기된 얼굴을 묻고
투신하는 붉은 꽃들

죽어서 할 참회라면 살아서 진혼하라

산과 들 다 태우던 불놀이를 멈춘 섬이

지노귀 축문을 외며
꽃상여를 메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