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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김수엽 시인 시집 <등으로는 안을 수 없다> 등록일 2022.04.14 22:20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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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수엽

전북 완주 삼례에서 태어나 1992년 중앙일보 연말 장원과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조집으로 「등으로는 안을 수 없다」가 있다.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지원금을 받았고 
현재 역류, 율격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꽃심’ 전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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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대하는 태도



살아가다 내 눈물이 메마르다 싶으면
봄날 막 피어난 은행잎을 들여다봐
자연이 빚어낸 잎맥
황홀한 눈물이다

숨겨둔 호흡들이
봄기운에 들켜서
나무가 이파리를 툭 던지며 말 걸어온
내 몸도 오돌토돌한
꽃이었다 열매이다

나를 찾아온 친구
내가 찾아간 친구
환장할 옛이야기 우물우물 씹어서

닫힌 입
깨고 나오면
너와 나 우리



등으로는 안을 수 없다



너의 눈빛 나의 눈빛
한 점으로 부딪칠 때
그 순간 숨이 멎고 손바닥에 땀이 나면
이런 게
사랑이라고 내 심장이 쿵쿵거린다

그대 앞에 눈 감아도
한꺼번에 안기는 마음
손잡으면 체온들이 부딪쳐서 뜨거운 몸
목젖이
꼴깍거리며
마른침을 삼킨다

마주 봐야 느낄 수 있는 그 사람 거친 호흡
돌아서 등 돌리면
모든 혈관 식어서
절대로
내 넓은 등도
그 등을 안을 수 없다



5월, 과원



꽤 오래 익혀왔던 복사꽃이 퍼졌다
겨울을 건너온 자가
허공에다 피운 빛깔
볼수록
꽃잎의 모양 속일 수 없는 유전자

똑같은 꽃 모양과 색으로 베푸는 섭리
꿀벌들이 날아와서
꽃부리 툭툭 치며
꽃가루 핥아먹는 일
이 장엄한 자연의례

그래 좋아 꿀벌들의 발바닥과 손놀림
열매를 폭 감싸는
수많은 노란 봉투
노무현
그 이름 하나
달콤하게 익고 있다

사람 사는 이 세상

아파서 우는 사람들
나에게 고통을 준 그 괴물도 용서하라
임의 말
봉지 안에서 과즙으로 차온다



뒤척이다



사전을 뒤적이나 '늙다'가 귀에 들렸다
흰 머리칼 굽은 허리
엄마가 말을 건다
아가야
저 홍시 하나-

감나무가 흔들렸다

사전을 뒤적이다 '죽다'가 눈에 잡혔다
굽은 허리 곧게 편 채
엄마는 말이 없다
아직도
감나무에는
홍시가 주렁주렁

사전을 뒤적이다 '살다'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 내외 손주 녀석
대문 열고 뛰어든다
마당에
감나무 하나

튼튼하게 서 있다



꽃을 심었더니 봄
- 엄마의 이름



사전 속에 꿈틀대던 '황'자를 구입하여
점자책 더듬듯이
공책 위에 심었더니
뜨겁게 쿵쿵거리며
반짝반짝 봄꽃이다

사전 속에 숨어 있던 빛나던 '금' 자를 캐
뭉뚝한 손가락으로
한 칸에 그려 넣으니
닫혔던 엄마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사전 속에 갇혀 있던 곰삭은 '순' 자를 꺼내
마지막 빈자리에
그마저 저장하니
아 벌써
나뭇가지에 오돌토돌 흰 눈이다



통과의례



긴 밤을 건너야만
아침을 볼 수 있고

나무 속 뚫고 나와야 초록빛이 되는 것

나 또한
엄마 뱃속을
빠져 나와 이 숨 얻었다



사랑이 사랑일 때



딱 한 사람 그리워하는 무게만큼
커가는 것
만나면 말 못 해
하늘을 훔쳐보는

딱 순간
심장이 덜컹
손바닥엔 흥건한 땀



달팽이의 걸음으로



골목마다
제 몸을 구겨 넣고 다니는 삶

쌓여 있는 폐지들을
덥석덥석 물어 와

손수레
가득 채우면
신작로로 퇴근한다



신발론



하나의 지구 위에 내 길을 만든 운명
더러는 유리 조각
때로는 돌멩이에
짲기고
형체 무너진 내 삶의 이력서

낮 동안 분주하게
발 냄새 저장하다
점심때 현관에서 밟히고 차여도
주인을 탓하지 않는
그 입이 무거운 당신

바쁘게 걸어온 삶 너덜너덜 피부마다
병원에 가 기우고
잘라내고
광도 냈지만

이제는
정년퇴직 후
안식년에 든 그 사람



봄이라는 유전자



그 겨울 몰락했던 빛깔들을 잘 챙겨서
땅 위로 살짝 오는 초록의 그 숨소리
잠자던 아이들이 깨
가지마다 돋는다

까칠까칠 나무들이
계절에 저항할 때
홀쭉했던 산맥마다 파릇파릇 털이 솟고
땅속은 손을 내밀어
내 껍질을 벗긴다

저 강물 어루만지면
흥에 겨워 뛰어간다
풀어 놓은 수초잎도 고개를 끄덕이는
새 혁명
불가피하게 순환하는 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