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말
  • 시조나라 작품방
시조감상실
  • 현대시조 감상
  • 고시조 감상
  • 동시조 감상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신춘문예/문학상
  • 신춘문예
  • 중앙시조백일장
제주시조방
  • 시조를 읽는 아침의 창
시조공부방
  • 시조평론
휴게실
  • 공지사항
  • 시조평론
  • 시조평론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김제숙 <홀가분해서 오히려 충분한> 등록일 2021.09.17 21:01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363


김제숙.jpg

-----------------------
김제숙

부산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여성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밑줄 사용처 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수필집 여기까지 가 있다.
---------------------

그 여름의 맨드라미



복면 쓴 자객의 잘 벼린 비수이거나

미처 꺼내지 못한 몸속의 불씨이거나

오래전 미리 써두었던 붉은 묘비명이거나


벚꽃, 만개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조달된 군자금으로
몸피를 부풀리며 세력을 확장한다

이때를 기다려왔다,
일시에 전면전이다

쏟아지는 봄볕에 경계가 헐거워져
닫아건 몸의 빗장 거짓말처럼 무장해제

마음을 놓쳐버렸다,
황홀한 봄의 전쟁



경고



마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철거합니다
진심 없는 간보기는 과감히 사절합니다
포장만 요란한 사랑은 영원히 결별입니다

여적 못 꺼낸 마음 버스 그만 떠납니다
쟁여놓은 시간들 유효기간 코앞입니다
인생은 리바이벌이 없습니다, 결단코!



시인의 변명



무장을 강요하는 이 무장한 시대에
무장에 무심한 변방에 사는 이가
일상을 한 장씩 넘기며
힘을 빼고 쓰는 시

가벼운 일별로만 쓰윽 읽어내도
밖을 겨눈 칼끝 거두는 비무장을 위해서
칼보다 강하다는 펜,
그 펜을 벼린다



수상한 태기



시인 영감이 쓴 시집 한 권 읽었더니

그토록 기다리던 영감이 다가왔다

이 영감 잘 품었다가 낳고 싶구나, 멋진 시!



맨드라미



울면서
잠든 밤

투구 쓰고
나타났다

고향집 꽃밭에서
보초 서던 근위병

아버지,
언제나 내 편이던

생시인 듯
환한 웃음



꽃, 등고선



더운 피
그에 못 참고
야반도주 뜨거운 몸

수소문 해보니
북쪽으로
가는 중이란다

한순간
더운 숨결에

가슴마저
허물어졌단다



저녁을 굽다



모서리가 다 닳은 빈 벽을 싣고 와서
다시금 등을 누일 새 거처에 두른다

덜 삭은 한 줌 욕망도 머리맡에 걸쳐둔다

나보다 먼저 와 빈집을 서성대던
허기진 허기가 마음을 어지럽혀

저무는 오늘을 꺼내 식탁을 차린다

그만 버려야지 묶어둔 삶의 조각
남루에 헹구어 기어이 다시 건다

탈골된 흰 언어 몇 개로 저녁을 굽는다



홀가분해서 오히려 충분한



토씨 하나도 아까워
쟁여두던 시절 지나

어제는 형용사
오늘은 부사와 결별

몇 개의
동사만으로

오히려
충분한 삶






저 너머 유년의 뜰 풋감 떨어지는 소리

서른 번도 더 읽은 소설책 흥미 잃는 소리

첫사랑 미련 한 자락 옆구리 찌르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