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송
경남 고성출생,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978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옴 작품집으로는 <겨울 달빛 속에는>, <제철공장에 핀 장미는>, <안테나를 세우고> , <응시>, <바람 변주곡>, <보수동 책방골목>, 평론집 <우리시의 현주소>가 있음, 성파시조문학상, <한국시조> 작품상, 이호우. 이영도 문학상 수상, <부산시조> 편집주간, 부산문인협회 부회장,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부산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국제시조협회 회원 -------------------------------
안개비 내리는 날
오늘은 수양버들이 사념들을 내려놓고
입김 같은 얇은 천을 휘장으로 드리우니
실바람 건듯 불어와 일렁이는 정감 한 필
이 계절 행간에서 너의 맘을 두드리면
연듯빛 머리칼은 그리움에 젖어있고
내 영혼 닦은 창으로 네 가슴이 열려온다
내가 든 그대 숲은 하눌 숨이 드나들어
시간도 비껴가는 비경 한 점 그려낼 즘
너와 나 안개비 속에 이 둘인가, 하나인가
정물화, 사과
식탁 위 흰 접시에 사과 한 알 붉게 타고 저만치 파란 날 선 과도果刀가 놓인 것을 창에 든 가을 햇살이 극사실로 그려준다
사과와 칼날 빛이 긴장하는 거리 사이 내 안에 또 내가 있어 이 국면을 응시할 제 자장이 서린 시간 딛고 과도를 집어 든다
존재를 싸고 있는 껍질을 깎아들면 사각사각 과육 말은 씨앗으로 돌아가고 극사실 해체가 되고 추상으로 뜨는 시원
난초꽃, 가을
벽공무한 맑은 경經을
네 숨결로 필사해서
봉인해 두었다가
오늘에사 뜯는 건가
은하계
이전 소식이
문향文香 피는 가을 행간
오드리 헵번을 살아있다
손녀가 휴대전화 배경화면 보여준다
불결치는 긴 치마에 잘록한 허리곡선
상아의 목을 지나서 맑은 눈에 고인 미소
초등학교 4학년이 소유한 작은 정원
흑백으로 뜬 영상은 청순한 계절이고
스카프 맨 흰 셔츠가 바람따라 숨을 쉰다
이 스타가 출연한 영화제목, 뭔지 아니?
내 요정이 '로마의 휴일' 추억 같은 답을 하자
명랑한 소녀 감성 곁에 상큼하게 나선 헵번
종이학 접기 -시간여행 5
종이학 천 마리를 유리상자 고이 담아
내 가슴에 안겨주던 여학생이 걸어온다,
초승달 그린 눈썹 아래 샛별 돋은 눈망울로...
그날 나는 제자 앞에 대쪽 깎은 말을 들고
수공 시간 펼친 위에 접시 입시 전황戰況 비춰주자
천 마리 학이 되어서 세월 속을 날아간 꿈
빈 상자에 영원처럼 내 맘 속에 남은 얼굴
일천 번 손을 모아 첫정 빚던 푸른 밤들
내 오늘 노을 진 하늘에 그 순수로 시를 접다
해일 예감
귀 막고 색깔대로 파도 타고 노는 이들
이 한철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하얘질 녘
해안선 멀어져간다 접은 날개 가다듬자
출근길에서
꽃눈이 몽우리 진 도심지 가로수길 유리창 진열대에 신상품이 나와 있다 산뜻한 색상과 디자인, 봄을 걸어 놓았다
그러나 봄은 아직 길목에서 서성이고 바람 냄새 맵싸하여 코끝이 빨간 아침 행인들 곤비한 삶에 좋은 소식 피어날까
온 나라가 코로나로 긴장을 증폭하고 이념으로 갈등 빚어 골이 깊은 정국인데 큰 그림 그린 치세로 봄옷 새로 입을 날은...
풀꽃, 가을
밤마다 싸락별이
그리움을 떨군 걸까
방울종 소리 피는
색깔 맑은 풀꽃들이
해상도
높은 들녘에
고향처럼 손짓한다
향수
하늘에 뜬 별들도 저마다 외로워서
깊은 밤엔 그리움을 남 몰래 떨구더니
그 눈물 씨앗이 되어 풀꽃들이 피어났다
풀꽃이 갈바람에 저리 마냥 흔들림은
제가 온 고향하늘 그리운 몸짓이지
외로운 영혼들이 빚는 그리움의 빛과 향기
별꽃*
눈물로도, 기도로도
회향할 수 없는 길목
그대로 순명해야
달빛드는 生생이 되어
너 가고
남은 이름이
내 맘 속에 별로 핀 것
*석주과에 속한 야생화로 5~6월경 개화하고, 꽃말은 추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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