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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류미월 시인 시집 엿보기 <나무와 사람> 등록일 2020.09.12 08:06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440


류미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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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월

경기 포천 출생
2008년 <창작 수필>, 2014년 <월간문학> 시조 등단
산문집 <달빛, 소리를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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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을


기러기 소식 물고 강 건너는 오후 4시
해넘이 물들이는 반사경 그 수면 위에
기나긴 목덜미 타고 터진 연밥 까만 속내

덧칠한 유화처럼 말라터진 저수지에
하루만큼 물비늘이 얼부풀기 전 반짝이고
물총새 깃 터는 소리 가을 하늘 가른다

힌 생의 겨울 맞는 아버지 움푹 팬 얼굴
서릿발 견뎌낸 후 더운 연밥 또 지으려
속 그늘 품은 동공이 호수마냥 하마 깊다


유리의 벽


오월과 유월 사이 단단한 벽이 있다
풀과 나무 사이에도 거대한 벽이 있다
힘으론 깨트릴 수 없는
저 완고한 유리 천장

라일락꽃 시들어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
어질대며 퍼져가는 햇살의 파동에 실려
신기루 벽을 뚫는다
잠든 도시 깨우며

황사빛 구름들이 유혈목이 풀어놓고
뱀딸기 붉은 열매 선악과로 익는 계절
여름이 회전문을 돌아
옥상 난간 넘고 있다


연기의 시간
 

늙은 노부 목숨 앗고 자식마저 떠난 폐가
숯검정 나뒹굴듯 불꽃 그리 사라졌다
연기는
산 자들 기호
헛헛한 속 달래는

부도난 은발 k씨 줄담배 연신 피워댄다
경계 없는 삶의 부침浮沈 뭉게뭉게 피어나고
자욱한
구름의 변주
집안 가득 맴돈다

예전엔 몰랐었다 철록어미 울 아버지
애간장 녹아내린 아픈 시간 계보란 걸
이 빠진
낡은 재떨이에
한 가계가 절여 있다


꽃무늬 스카프


유품을 정돈하다 눈에 밟힌 그 스카프
기나긴 날 휘감았던 지나온 저린 얼룩
어머니 가루분 체취
꽃잎 위에 실어온다

장롱 속 수납장에 잠자듯 가물거리고
어느 날 먼지 털다 발등에 툭 떨어진
한순간 소름 돋듯이
꽃무늬가 고개 든다

말로는 차마 못해 안부 묻는 몸짓으로
강 건너 보내오는 후드득 매화 소식
어느 새 또 봄이 어려나
거울 앞이 환하다


밤나무 어머니


바람은 옹기종기 식솔처럼 따라와서
침묵으로 느런히 선 밤나무 숲 뒤흔들고
알알이 굵어진 송이
수런수런 일렁인다

알밤 툭! 떨어진다 앙다문 입 궁금한지
가시 발린 오동통한 말씀들이 샇여간다
오십견 가파른 언덕
떨어지는 우박 같이

보듬믄 그 약손으로 "애야! 애야, 별일 없니?"
길 떠나신 어머니가 정문일침頂門一針 일깨우나
우듬지 환한 밤나무
양팔 벌리고 서있다


가을의 품


어깨 힘 풀어진 날엔 공원 벤치 앉아본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바람이 빗겨주어도

시든 꽃
지는 향기는
가슴 그늘 늘려간다

주름살이 하나 늘면 사람 품도 넓어질까
누구를 품는다는 건 제 속 먼저 비우는 일

큰 거울
투명 하늘에
마음 자락 펼친다


압력밥솥


초대도
안했는데
살금살금 놀러 와서

첫새벽 칙칙폭촉 힘차게 달리자고

식구들
잠 깨워 태우는
우리 집 꼬마열차


눈뜨고 싶다


동네 슈퍼 모퉁이에 잘나가던 남도횟집
불 끄고 눈 감더니 마침내 임시휴업
수족관
광어 세 마리
숨소리가 거칠다

탁한 물 뜸한 발길 지느러미 바닥 길 때
그늘진 얼굴 위에 펴정 없는 퉁방울눈
활어회
싱싱한 꿈도
거품 물고 보글댄다

무릎관절 다 닳도록 지역 경기 낮은 포복
방어 떼 등 푸른 물결 언제쯤 몰려올까
밤 잊은
집어등처럼
알전구는 눈뜨고 싶다


중독에 빠지다


엄지가 신들렸다 네모 위에 너울질로
중독된 시간 속을 넘나드는 환한 불빛
화성인
불시착 했나
교란 신호 뜨악하다

스마트폰 봇물 터져 살가운 말 사라지고
풀지 한 상형문자 속삭임이 간절하다
블랙홀
허우적대는
일개미의 먹먹함을

다디단 꿈 냉큼 깨운 후드득 일림 문자
걸음마다 끌고가는 뵈지 않는 족쇄인가
탈출을
기도하는가
땀에 젖은 피에로!


나무와 사람


살구와 자두나무를 접뭍여서 심는 날
햇살과 바람에 새 울음이 새살 돋고
볼 탱탱 다디단 과실
열리는 꿈을 꾼다

거름 주고 가지치기 사람의 일이라면
목마를 때 비 흠뻑 내리는 건 하늘의 일
둘이서 한 몸이 되어
무성하게 번진다

해도 해도 죽어라 안 되는 일 비일비재
나무와 사람 사는 일 어디 크게 다를까
나무도 제 할 일 다해
금빛나는 과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