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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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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숙희 시인 시집 엿보기 <먼길을 돌아왔네> 등록일 2020.09.19 08:40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413

서숙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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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


경북 포항 기계면에서 태어나서 1992년 『매일신문』과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고,

1996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아득한 중심』 『손이 작은 그 여자』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 시조선집으로 『물의 이빨』이 있다.

백수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열린시학상, 경상북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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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나는 스스로 바람의 딸이 되련다


아슬한 벼랑 위에 한 생을 걸어놓고


명치 끝 으스러지도록 그늘을 껴안으련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슬픔과 내통하여


행여 비칠 연분홍 몸의 문장 따위는


뜨거운 갈증의 가윗날에 뭉텅뭉텅 잘리련다


봄이 다시 황홀한 저주처럼 찾아올 때


입술을 헐리우며 야생의 어둠을 먹고


한사코 꽃잎을 밀어내는, 희디흰 꿈을 꾸련다




팔에 대한 보고서




1

나팔꽃은 덩굴로 난간에 꽃을 피웠다

선인장은 가시로 피 묻은 자서를 썼다

지상의 생존 방식에 삶은 늘 복종했다


2

어깨와 손목 사이, 견갑골과 수근골 사이

날개도 아니고 앞다리도 아닌 이름

천사와 짐승 사이애서 체세술을 더듬었다


욕망은 퇴화보다 진화를 거듭하여

필사적인 표정은 소매 속에 감춰두고

살 오른 삶의 몸통을 터지도록 껴안았다




아프릴레*




나는 죄 많은데 참말로 죄 많은데 


꽃 보며 웃는데 사막처럼 웃는데


너는 왜, 왜 죄도 없이 죄 없이도 울고 있나


환자서 받는 밥엔 적막이 한 상인데


꽃 두고 나비 두고 모두 다 어디 갔나


허공은 봉두난발로 봉두난발 무너지는데


노래는 굽이굽이 여태도 굽이굽이라


못다 부른 끝 소절은 못다 불러 붉은데


울음은 왜 캄캄하나 이리 환한 대낮인데




*사월(Aprile),이차리아 가곡




사진은 왜




사진을 보는 건 조금 쓸쓸한 일이다


어느 먼 추억 속에 꽂혀 있는 생의 한 갈피


사진은 왜 과거 속에서만 희미하게 웃을까


나비가 잠시 앉았던 것 같은 그때 거기서


젊은 한때가 젊은 채로 늙어가는데


사진은 왜 모르는척 모서리만 낡아갈까




지는 꽃




한나절 사월 꽃은 지기 위해 피었던가


연분홍 저 허공이 통째로 무너진다


내 사랑,


귀엣말처럼 왔다가


천둥처럼 가고 있다




어떤 죽음




그는 죽었다

무슨 징후나 예고도 없이

제 죽음을 제 몸에 선명히 기록해두고

정확히 세 시 삼십삼 분 이십이 초에 죽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죽음은 타살에 가깝다

오늘을 어제로만, 현재를 과거로만

미래를 만들 수 없는,

그 삶은 가혹했다


날마다 같은 간격과 분량으로 살아온

심장이 없어 울 수도 없는 그의 이름은

벽시계,

뾰족한 바늘뿐인

금속성의 시시포스







만년필 푸른 촉이 잉크를 물었다


너무 젖지도 않게


너무 마르지도 않게


촉촉한 머금음이 쓴,


살아 있는


시의


촉!




퇴근길




오늘도 엑셀보다 브레이크를 더 밟았다

퉁퉁 불은 피로에 바퀴는 되감기고

낡은 등 하나같이 붉은 소나타씨 코란도씨


하루치 밥벌이에 저당 잡힌 멱살을

시동을 끄면서 지하 주차장에 부려놓고

굽히고 조아렸던 몸, 탁탁 털어 수습한다


명치끝 저리도록 안아야 할 살붙이들

헛기침 두어 번으로 쳐진 어깨 올리고

딩동댕! 한 옥타브 높게 현관문을 누른다




여름 절집 연밭은




곧게 세운 마음 끝에 잎 하나씩 열어놓고


범종 소리 독경 소리 꼿곳이 받아 적더니


짙푸른 반야바라밀을 가득하게 펼쳤네


다 찟기고 얼룩진 빗방울 몇 알도


한 잎 한 잎 저 경전 쓰다듬고 받들어


알알이 말씀 보석으로 발갛게 앉히었네


시린 벼랑같이 자꾸만 가팔라져가는


내 헐벗은 기도 한 줄 뚝뚝 잘라 꺾어


저 연밭 한 모퉁이에 푹 꽂아나 둬볼까




그렇게 가을 저녁이




수척한 한 사람이 낡은 신발을 끌며 와서


장렬했던 그 여름의

모자를 벗어두고


목침에 마른 침 괴듯

그렇게 가을 저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