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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이은정 시인 시집 엿보기 <서걱이다> 등록일 2020.09.19 15:45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406

이은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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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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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지도를 걷다  




울퉁불퉁 멍울진

도롯가를 지나가면

햇볕에 그을린 커다란 손바닥처럼

노란색 페인트 벗겨진 거미줄이 보인다.


발아래 느껴지는 다른 촉각들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바쁜 걸음 앞에

다리가 셋인 사람들이 말줄이표로 서 있다.


힘겹게 겪고 있는 지팡이를 의지한 채

행여나 넘어질까 숫자 세는 신호등처럼

문밖엔 아픈 신호음이 지금도 깜박인다.




오월



오월은 붉어서

천지가 붉어서

산딸기 옷자락에 숨어있는 불씨처럼

뜨겁다

한없이 뜨겁다, 달구어진 인두처럼.


달팽이 느린 걸음도 쉬어 가는 정오에는

땅 파던 농부들 짧은 낮잠에 들고

네모난 창 너머에는

푸른 바람이 넘실거린다.




서걱이다




너와 나 사이에 서걱이는 그 무엇은

색색의 마음 닮은 낙엽이 그러하듯

속이 빈 현악기처럼 아픈 소리를 낸다.


가을은 잔물결로 속삭이는 실비로

그렇게 다가와 스치듯 지나가고

잠깐만 한눈팔아도 나를 잃어버린다.


너와 나 사이에 뜨겁던 사랑도

몇 번의 이유 없는 소리로 서걱거렸고

우리가 하나일 때도 가을은 가끔 슬펐다.  



가을 부석사



달빛에 물이 든 부석사 은행나무

일주문 기둥이 노란빛 뿜어낸다

굽잇길 돌아서 닿을 화엄의 나라로.


석등이 불러 모은 시간의 발자국

불빛을 좇아서 돌계단 올라서면 

선묘의 애틋한 마음 전설로 타오른다.


처마 끝 풍경의 오래된 기다림은

소백산 능선 타고 눈꽃이 피기까지

배흘림 무량수전 곁에 소복하게 쌓여간다. 



내소사 설화



내소산엔 아직도 꽃봉오리 맺혀있다

꽃살문 사이사이 천여 일이 맺혀있다

바래고 지워진 세월 결 따라 맺혀있다.


사미승 두고 간 마음 한 쪽 들여다보면

아득하고 아득하여 목탁 소리 처연하다

몇 번의 업을 닦아야 꽃봉오리 피어날까.


내소천 가로질러 살아나는 시간들

물이 되고 흙이 된 사람들을 잊지 못해

천년의 대응보전 곁에 꿈결처럼 맺혀있다. 




상사화 필 때 

 

 

절집 문간 넘어온 다가운 시선에

지난날 아팠던 순간 기다린 듯 달려와

기어이 꽃대 세우곤 상처로 차오른다.


어긋난 사랑의 끝자락에 매달린

마지막 불꽃은 스스로 타올라

발갛게 제 한 몸 누인

꽃이 된 사람들.


쉬이 잊히면 그것이 사랑인가

이렇게 피다 보면 언젠간 만나겠지

놓쳤던 인연의 끈이 풍경에 댕강댕강.



목련




잊혀진 어제가 불쑥불쑥 찾아오면

잰걸음의 바람은 능선 따라 달아나고

지워진 그대의 이름 진하게 우러난다.


귀퉁이 돌아 불붙은 꽃눈이 피어나고

초록빛 이름 두 손에 가만히 받아들면

저 멀리 구름 한 송이 손끝에서 흔들린다.



가을 아침에



시간은 둥근 곡선으로 흐르고

멀리 있는 안부가 바람결에 들리듯

어쩌면 그대와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우리의 뜨거웠던 순간이 꺼지지 않아

시간이 직선으로 뚝뚝 끊겨 떨어진다면

비 오고 바라 불어도 닿을 수가 없으리니.


시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흐르면

기다리던 소식에 마음이 먼저 끓어

한 다발 국화꽃 속에 그대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