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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우아지 시집 <또 불은 누가 켤까> 등록일 2023.01.13 21:16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1

우아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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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지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인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현대시조≫ 시조 등단을 시작으로 시조집 「히포크라테스 선서」, 「꿈꾸는 유목민」, 「염낭거미」, 「손님별」, 「옥상 달빛 극장」, 현대시조 100인선 「점바치 골목」이 있다. 부산시조작품상, 성파시조문학상, 부산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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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언제나 옳다



얼굴 없는 부처님이 참 많은 서라벌 땅
약수골 열암곡 첩첩 계곡 발길마다
보고도 볼 줄 몰라서 여기 몸을 풀었나


몸으로 떠받치는 그 길마저 사라질 때
바람만 좌대에 와 채우고 또 비운다
시작은 언제나 옳다 시린 생각 품은 채


먼저 와 기다리는 초발심 서툰 걸음
발 뻗고 편히 앉은 볕도 둥근 경주 남산
눈앞에 오르막길이 문을 열어 젖힌다



또 불은 누가 켤까


어머니 떠나신 방 물음표가 앉아 있다
혼잣말이 다닥다닥 말라붙은 부엌 바닥
나팔꽃 저물어 갈 때
고봉밥이 피어난다


유마경 외고 있는 구순의 울 아버지
고양이 밥그릇은 다 저녁 소일거리
하루가 문 닫아결면
눈을 뜨는 뭇별들


아랫목 이불 덮고 누워서 쓰던 일기
지금은 작은 몸집 등 굽은 대들보 아래
효도를 다짐한 일기장
내 유년이 다가선다



동짓날



잔기침이 쏟아내는
갇혀 있던 하얀 불안


시간을 또 포개서
겹쳐지는 두 계절


마침내
반환점 찍고
돌아가는 마라토너



고택古宅 갤러리



능소화 지기 전에 나서고 싶었던 길
취기를 누리는 듯 낡을수록 또렷하다
길 끊긴 도시의 큰 섬 홀로 남은 이방인


첫 명함, 가족사진, 어릴 적 일기 한 편
시차도 국경도 없이 복도에 걸려있다
갤러리 속내를 털어 다가오는 이명안개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오히려 슬픔인가
오래 묵어 향기 짙은 검붉은 와인 한 병
이제 막 도착한 가을 갈색 꽃이 피고 있다




동행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도로 오시게나
그 땅은 바로 사는 우리가 주인이다
때맞춰 새벽을 여는 깡깡이 소리 살아있다


대 물린 바다 보며 갈기 세운 대평동
잠을 터는 파도 소리 고래 잡던 슬기까지
베푸는 등 푸른 곳간 웃을 날이 많은 거다


공동체 마을 규약 그 속에서 둥지 튼다
배를 갖고 놀다가 목청 돋워 무지개 줍던
한목숨 넉넉히 살린 근대조선 정비 마을


보았는가 꿈을 펼친 오대양 어기찬 바람
힘줄과 땀방울에 달도 별도 내려앉은
나 또한 내일을 위해 문 열고 사는 거다




12월의 안부



삼겹살집 출입문에 안내문이 내걸렸다
"그동안 아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부르튼 가게 문 닫고 글썽이는 골목길


키보다 더 큰 짐을 수레에 올려놓고
저녁놀 소리를 끌며 비탈길 불러 세워
떠나는 모퉁이 너머 피멍 맺힌 발을 본다

어둠속 주인공은 크게 한 번 웃었을까
빛을 품고 살던 사람 바람의 매를 맞고
이력서 길게 드리운 뒷모습이 저문다




동해안 별신굿 보고서



허개등 달아놓은 용선이 있는 굿당
정월 보름 굿을 하면 확 풀리나 운수대통
정화수 신칼로 뿌려 나란히 놓인 무릎


가랑이 한껏 벌린 골메기신 모시고 와
핏빛이 비칠 때까지, 바닥 깨질 때까지
박수는 몇 시간 걸쳐 손발이 뜨거워라


집안의 성주신을 따르면서 비손이다
사설을 매만지며 부채를 쥐었다 펴는
빼곡히 적어둔 소망 탱탱 살이 오르네


흰 천에 노잣돈 꽂고 서로서로 손잡았지
용선에 오른 망자 극락세계 가시라며
스르르 머리맡에는 갓 돋아난 파래 냄새


길냥이 있는 왕릉



견장처럼 피어있던 햇살의 섬세한 손


어둠에 의자를 주고 스미듯 걸어간다

고양이 울음이 새는 저 홀로 숲 저무는



누워있는 어스름 녘 왕릉은 문 닫을 시간

올곧게 부푼 고요 깊어져 봉투 열면

먼 데서 서러움 걸어와 그 넓이를 읽는다



숲세권에 들다


발바닥 흙에 닿아 아스팔트 멀어진 날
깊은 숨 들이쉬면 솔향까지 스며들어
순순히 바지를 걷고 늦은 안부 묻는다


다시는 못 돌아올 제 갈 길 떠난 후에
삼나무 편백나무 건너편에 심은 허브
물음표 뒤척이는 곳, 그곳까지 가 닿을까


작은 새로 환생하면 여기 와서 살고 싶다
한생을 사는 동안 비 오고 꽃도 피고
저 멀리 바다도 다가와 저무는 해 펼친다



눈물로 이길 수 있다면



건네는 빵을 먹으며 울어버린 러시아 병사


꿈인지, 생시인지 총을 들고 있는 슬픔


다가와
울지말라고
작은 등을 쓸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