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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염창권 시집 <오후의 시차> 등록일 2023.01.13 21:32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16



오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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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보성 출생.
신춘문예에 시조(1990 동아일보), 동시(1991 소년중앙), 시(1996 서울신문) 등과 신인상에 평론(1992 겨레시조)이 각기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일상들』 『한밤의 우편취급소』가, 시조집으로 『햇살의 길』 『숨』 『호두껍질 속의 별』 『마음의 음력』이, 평론집으로 『존재의 기척』『몽유의 시학』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노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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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시간의 물약 같은 강물빛이 고여 있다.

흡혈의 영혼들이 쓰러져 누운
저탄장貯炭場

네 혀는 검고 말라서, 수유는 길고 진해서



오후의 시차


오후에 걸었다, 아직 일과 전이었고
시차를 읽어가듯이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복된 척후병의 눈빛이
내 안에서 날 겨눴다


구시가지는 총 맞은 표정으로 쓰러졌다
마스크를 쓴 형해가 크게 구멍을 파고 있다
추렴한 영수증처럼 눈앞이 희다, 또 붉다


새 몇 마리 낟알을 쪼고 있다, 딱딱한
바닥에 부리가 좋이 닿는다, 그 기세로
피 묻은 온도가 오른다, 볕 그늘이 성글다.



버스 표지판
- 여행자의 골목8


못 박아 둔 내 생활이 사소한 것처럼
구부러진 목을 하고 허공 한쪽을 파고 있다

구멍을 뚫는 이 기다림,


넌 그렇게 왔다 간다.



간격



어쩌다가 눈물을 싫어했다,
축축하게
매달리는 애착과 상실감의 틈입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것으로 아팠다.



소와 함께 걷다



이서에서 걸어오는 소를 만난 지 오래됐다

소는 아직 사람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흰 뿔이 각남에서 돋아 각북까지 밀고 갔다.



손 없는 날



산 사람은 이사를 하고
죽은 이는 이장을 한다


속이기로 한다면 오늘이 그날이다


달력에 없는 날이니,
넌 울고 갈 것이다


속임수를 알아채는 귀신같은 애인이여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져 찾지 못하는


숨겨진 슬픔으로 남아
조금씩 더 커가는



오동꽃 필 때


보랏빛 요령 소리, 오늘같이 시들어간 날


혼자서 그 길 걸으리

언제나 넌 멀리 있지,

얼굴에 꽃 진 자국을 숭어리째 건네줬지.



바닥


등나무 밑 구부정한 그림자, 줄 묶여 있다

걸으며 애써 끌고 온 생애가 빌붙은 듯

밑창이 닳은 길에서 만난 공중-

아찔하다.



어제라는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끝이 물린 옷자락이 문틈에서 파닥거렸다
부스에서 나온 넌 말없이 돌아섰고
한밤의 선로 위에는 외등이 켜져 있다

오던 길 돌아보면 새 발자국 찍혀 있다
살아온 내색을 하며 쓸려 가는 가랑잎들
불운을 빠져나왔는지 손바닥이 다 닳았다


심야의 종소리가 낯선 냄새를 물고 왔다
길바닥에 엉겨 붙은 그림자를 떼어낼 때
전라全裸의 수치를 끼얹은 채
네 얼굴은 닫혔다.




마른 갈대에 내리는 비


유리창 안쪽에서 날 내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눈 속에서 걸아가다 나왔을 때
천변의 살얼음 낀 곳에 그 얼굴이 이른댔다


물가에 선 갈대 군락의 발목이 거뭇했다
노인처럼 한쪽으로 낮고 길게 휘어졌다
무거운 빗줄기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