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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조는 민족의 노래며 역사였다 / 이달균 등록일 2019.04.16 13:40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398

시조는 민족의 노래며 역사였다 / 이달균

 

 

두 영웅, 왕조를 노래하다

 

개성 어느 한적한 곳. 지나는 가마꾼과 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진 골목 안집, 낮은 등이 켜져 있다. 방안엔 눈빛 형형한, 누가 봐도 왕재의 풍모와 야심 가득 찬 한 젊은이가 먼저 좌정해 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 선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식이 고결한 인품으로 드러나는, 그러나 올곧은 신념만큼은 변치 않으리란 기개가 번득이는 한 사람. 안부를 묻기보다 서로를 조용히 바라본다. 찻물이 끓고 죽로차 한잔으로 더욱 정갈해지는 마음이 서늘하다. 밖엔 황혼이 오고 바람결에 찻잔이 흔들리면서 알지 못할 정적과 비장함이 흐른다. 젊은이는 이쯤에서 술 한잔이 어떠냐고 넌지시 묻는다. 선비 역시 그도 괜찮다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황혼은 시나브로 어둠에 묻히고 몇 순배 불콰해진 얼굴로 젊은 사내가 약간 상기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간다. “대감, 제가 노래 한 수로 이 분위기를 살려보고 싶소이다. 결례가 안 된다면 허락해 주시지요.” “결례라니요? 예전 저 북방에서 듣던 그 노래, 오랜만에 그 호방한 노래 한 자락 들어보고 싶구려.” 젊은이는 특유의 호방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가〉를 읊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선비는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는 듯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단심가〉를 읊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방원과 정몽주의 만남을 극화해 본 것이다. 물론 시청률이 중요한 드라마에서는 이 장면의 긴장감과 정서적 벼랑 끝 대결보다는 선혈 낭자한 선죽교에서의 비극적 결말이 더 눈길을 끌 것이다. 더구나 할리우드적 빠른 장면전환에 익숙한 우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품격 있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 수의 시로써 역성혁명을 암시하고, 화답시 한 수로써 목숨을 건 절체절명의 최후를 예감하는 두 영웅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때론 액션보다 고요와 긴장이 더 관객을 몰입시킬 때도 있다. 이 역사의 현장을 장식한 두 수의 시조는 민족문학사에서 백미 중의 백미다.

 

우리에겐 오랜 세월 체화된 음악적 인자가 있다

 

그리고 다시 600년이 흘렀다. 지금은 K팝의 시대다. 황진이의 사랑시조, 송강의 가사, 윤선도의 시조, 허난설헌의 한시 등은 조선조의 명작들이다. 지금은 그 자리를 K팝이 대신하고 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르고 우리 가수들의 몸짓을 따라 한다. 엄밀히 말하면 K팝은 우리 고유의 가락과는 거리가 있다. 흑인 특유의 랩, R&B 등 웨이브와 솔(soul)이 대중을 이룬다. 그렇다면 왜 길거리나 골목에서 부르던 흑인음악이 세계의 젊은이를 열광케 하는 노래가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심성 저변에 깔린 언더그라운드적 본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그 흑인음악을 쉽게 소화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의 혈관 속에도 오랫동안 체화된 음악적 인자가 있다. 민간에서 불린 판소리나 창도 금기시해 오던 당대의 것을 표출한 대표적인 장르였다. 여기에 외세라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낯익은 것과 낯선 것과의 화학적 결합이 이뤄졌던 것이다.

 

노래는 이렇게 변화해 왔다. 시 또한 100년의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 변화와 함께했다. 1970, 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 자리는 어느덧 K팝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 열풍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함께하는 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 영상시대의 흐름이기도 하고 다변화 글로벌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중문화에도 순수 예술적 가치를 접목하는 시도가 있고 순수예술 또한 대중적인 것을 수용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시장이 거대해질수록 경계는 옅어진다.

 

신인이여, 전통서정에 함몰되지 마라

 

2000년대를 지나면서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시조, 독자는 있는가?” 이 물음은 공론화되지 않는다. 왜일까? 혹시 금기시해 온 것은 아닌가? 현대에 와서 쓰는 시조는 모두가 현대시조다. 그런데 현대적 요소를 가진 작품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가. 시조인들이 만나면 늘 하는 말, ‘시조냐 아니냐’ 하는 원론적인 논쟁을 벌인다. 일부에서는 시조는 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 변해서는 안 되는가? 변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워지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워지고자 하는 시조인들도 마지막 약속인 정형만은 어기지 않는다. 정형이란 정해진 그릇 속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여기서 무엇은 ‘언어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두를 신는 시대에 짚신의 노래를 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젊은 시조인이여, 두려워 말고 더 새로워져라, 더 변해서 돌아앉은 독자를 다시 돌아오게 하라. 그런 사명감이 없다면 돈벌이가 되지 않는 시조를 왜 쓰겠는가.

 

이상하다 당신은 멀수록 공손하다
무궁한 앞날을 빌어 주는 친절한 혀
오늘도 화면 가득히 검은 열매 맺었다

질겅질겅 껌 씹는다 착한 껌은 맛이 없다
부풀었다 터진다 가볍게 사라진다
유통이 엉망이구먼 공손한 세계들아

오늘의 비극은 이름이 없다는 것
내일의 희극은 이름이 있다는 것
비나리 친절한 나리 이름을 불러주오

무난한 건 안 되나요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모난 건 나쁘나요 십자가도 모나단다
운동복 거꾸로 입자 튀어나온 무릎만큼

공손한 말들을 주머니에 그득 담아
마당굿에 던져본다 흩어지는 쌀알들
당신을 버린 건 나요 이 몸이 버렸소

— 서상희〈비나리〉(《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이 작품은 앞에서 서술한 마음을 대변한다. 비나리는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동네방네 다니며 풍물치고 지신 밟는 걸립패들의 고사를 일컫는다. 전통의 소재를 들고 왔으나 노래는 현대적이다. 비나리 특유의 주절거림이 거침없어 좋고 세상을 향한 일갈이 신선해서 좋다.

 

“착한 껌은 맛이 없다”는 “공손한 세계들아”로 이어진다. 늘 씹던 껌의 향기에 길든 공손함은 우리가 원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셋째 수에서 “비나리 친절한 나리”로 비틀어 표현한다. 주억거리며 비나리를 노래하되 너무나 “친절한 나리”, 익숙하게 공손하고 예의 바른 나리라면 사절이다. 세상은 모난 것을 경계하지만 정작 십자가는 모나지 않는가. 시인이 구현하고 싶은 것은 원이든 못의 뾰쪽함이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굿거리판을 펼쳐 그 평범을 내던진다. 내가 당신들에게 왕따 당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 당신들 전체를 왕따시키고 싶은 것이다.

 

서상희는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인이다. 연초 벽두에 신인을 탄생시키는 이유는 치열한 습작의 과정을 인내한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기존의 시단에 새 피를 수혈하자는 의미도 있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너무 시조적이지 않다.’ ‘아직은 축약의 미를 모른다.’ 등등. 그러나 신인에게 너무 축약을 강조하다 보면 일찍 상상력의 한계에 갇히게 되고, 시조적이기를 원하면 자유롭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맘껏 펼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시조적이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시조단 전체에 만연된 전통 서정의 결여를 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제발 이 말에 상처받아 날개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신인다운 당돌함과 신선함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독자가 있음을 잊지 말기를. 랩 가수에게 전통가요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문예사조는 늘 이전의 정의를 깨뜨리면서 창조되어 왔다.

 

더 크게, 더 자유롭게 상상하라

표범이 되고 싶다
나 다시 태어나면
해와 달 거죽에 새긴 얼러기가 아니라
온몸에 어둠을 두른 흑표로 살고 싶다

그늘마저 태워버린 검으나 검은 땅에
볕이란 게걸스런 청소부족 그들의 것
배부른 지난 생애는 개미나 줘 버리자

날고뛰는 숨탄것들 숨죽인 귀소 앞에
더운 피 하소하듯 소리소리 치고 싶다
사파리 붉은 아침이 별빛 삼킬 때까지

길 위에 길을 내며 종종대는 뭇 사람들
1만 촉광 빛만 좇는 태양신의 도시에서
오늘도 밤의 제단에
나를 고이 바친다

— 임채성 〈검은 표범〉(《유심》 5월호)

 

편두통 시작되고 머리가 생각나요
마비된 다리에서 다리가 만들어져요
아픔을 생성하는 곳
잊었던 몸의 실체

미행을 들으면서 미행을 따돌리는데
추행을 읽으면서 추행을 씻어내는데
때 없이 시리고 저린 세상의 팔다리들

눈부신 유리성채 바람벽에 붙어서
새들아 눈 감아라, 번쩍이고 싶던 맘
통증이 재조립하는
몸을 고대 만나요

— 서연정 〈몸의 현상학〉(《정형시학》 봄호)

 

임채성이 발표해 온 작품들은 남성성이 충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견지하려 했던 것은 서정의 내적 응축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 이상의 무엇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답답함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는 이런 몸짓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스케일을 크게 부풀리기보다 수컷 특유의 야성을 보여줌으로써 시조의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시집 《세렝게티를 꿈꾸며》의 연장선 위에 있다.

 

맨 처음 관념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망을 그리다가 마지막엔 초원에서 순응하는 법, 즉 관념마저 벗어던지는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만큼이나 일정 부분 아쉬움도 있다. “배부른 지난 생애는 개미나 줘 버리자” “나를 고이 바친다” 같은 구절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더 크게 자유롭고 더 크게 상상하는 시인이기를 기대해 본다.

 

서연정의 시는 인식의 태도를 보여준다. 시에서 인식은 감각적으로 인지한 것들과 지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 인식의 과정을 통해 어떤 대상은 더욱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통찰력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늘 머리는 몸보다 늦게 열린다. 불에 데고 나서야 위험을 알아차리듯 편두통이 시작되지 않았을 땐 머리의 존재마저 잊고 산다. 마비된 다리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비약해 읽자면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각이 부서지지 않았으면 그 교량의 소중함을 모른다. 몸에서 아픔이 생성되지만 결국 몸의 소중함은 머리로 인식하게 된다. 내가 미행당하지 않았기에, 내가 추행당하지 않았기에 남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했다. 시인은 이곳저곳 “때 없이 시리고 저린 세상의 팔다리들” 앞에서 눈 감은 새가 될 것인가, 부릅뜬 새가 될 것인가를 자문한다.


시조,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고양이 붉은 눈빛이 휘어진 깊은 오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바닥에 그림자만 잔뜩 포개며 낳는다

사방에서 들뜬 햇빛 여자 몸을 핥는다

까르륵 웃음소리 멀리서 났던가
비좁은 철망 사이로 가을 해가 내달린다

저물녘 여자는 갑자기 바빠졌다
제가 낳은 그림자를 제 몸에 도로 넣는다

그 몸이 지워지고 없다 그림자도 거기 없다

— 우은숙 〈몸이 지워진다〉(《정형시학》 봄호)

 

병실 문이 열린다
하루 세끼
끼니 시간

각자 따로 먹는
힘겨운 숟가락질

요양도
배식이거늘,
물러서지 않는 식판

— 이승은 〈엔드게임-체스의 용어로 패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시와 문화》 봄호)

 

위의 두 작품은 자유로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무엇을 상상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굳이 철학적 사유를 들이댈 이유는 없다. 논리적인 사유체계를 벗어난 것이 부조리한 현상들이다. 딱히 무엇이라 정의할 수도 정의되지도 않는다. 두 작품은 공히 몸에 관한 시다. 상실과 소외는 회복과 자각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우은숙의 〈몸이 지워진다〉를 읽으면서 굳이 몸의 의미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붉은 눈빛”의 고양이(猫)가 전해주는 미묘함을 느끼면서 중장으로 넘어가면 된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가 그림자 위에 그림자를 낳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 미묘한 존재는 첫 수에선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수의 중장인 “까르륵 웃음소리 멀리서 났던가”에 이르면 어떤 환청이나 환각의 상태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므로 “철망 사이로” 달아나는 햇빛은 이상의〈조감도〉를 관통하는 ‘아해’와 닮아 있다. 셋째 수에서도 구체적인 그 무엇은 잘 만져지지 않는다. 모두가 구체적인 알몸을 드러낼 때 이 시인은 석연치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재미를 안겨주려 한다.

 

이승은의 〈엔드게임〉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을 다룬 시다. 이 작품도 설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분위기는 켄 키지의 장편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표백된 병동을 연상시킨다. 무대가 정신병동에서 요양원으로 바뀌었고, 거대한 폭력을 비트는 주인공 맥머피가 없을 뿐이다. “요양”과 “배식”은 수동적인 것인 데 비해 “물러서지 않는 식판”은 공격적이고 능동적이다. 기력은 잃었지만 본능적인 생명의 갈구를 본다. 이 부분에서 부제로 명시한 “체스의 용어로 패배를 피할 수 없는 상황”과 연결된다. 아무리 능동적으로 식판을 지키려 해도 서서히 다가오는 최후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절망에 저항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그 무엇에 관한 이야기다.

 

혹자는 퍼즐게임처럼 읽히는 이 두 작품을 놓고 앞서 거론한 ‘시조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초장에서 던지고 중장에서 풀고 종장에서 맺는 일반적인 공식과는 거리가 있다. 난해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두 시인은 공히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말한다. 독자로서는 자유시의 생경함과 난해함에 비하면 이 정도의 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이 난해함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에 대한 새로운 담론은 필요해 보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시조의 외연이 확장되고 지평이 확대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생산적이란 생각이 든다.

 

민족의 역사이며 노래였던 시조, 다시 그 시절을 생각한다. 고려 500년의 종지부를 찍고 또 다른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한 혁명가와 비록 서까래는 썩고 사문난적이 궁을 유린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왕조를 붙들고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선비와의 한때. 그리하여 〈하여가〉와 〈단심가〉는 전 국민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으리라. 세월이 흘러 노산의 〈가고파〉도 전 국민이 애송하고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었다. 시조는 이런 힘이 있었다.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맥박처럼 굳건히 살아온 시조, 그 힘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워져야 하고 그 새로움에 경배해야 한다. 

 

 

 

 

 

이달균 moon1509@korea.kr / 시인. 1987년 시집 《남해행(南海行》과 무크지 《지평》으로 문단 활동 시작. 시집 《문자의 파편》 외 4권, 영화 에세이집 《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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