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석 달 열흘 동안 속 깊이 잉태했다가
대지 위로 뿜어 올린 겨울은 잠적해도
초록은 어머니 품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
내리쬐는 볕살 속으로 숨 쉬는 이파리들
초록은 돌아갈 날짜 잊지 않을 것이다
코브라
끊어내어야 하겠구나 끊어 버려야겠구나
끊어낼 수가 없구나 끊어낼 길 없구나
대가리 높이 쳐든 채 꼬리 잡힌 저 코브라
월류봉
꽃이란 꽃 다 피워놓고 바람까지 초대한 봄의 불꽃 속
내 헤아릴 길 좋이 없어 소리쳐 흐르는 물에 뛰어내리는
꽃발자국
네가 저 봉우리라면 나는 그 발밑 강물 즈믄 해의 깊이
로 함께 할 수 있으니 발가락 하나하나 어루만질 것이다
속속들이 스미어 곳곳에 스미어들어 내 몸의 푸른 피
네 영혼 적시나니 네가 저 봉우리라면 나는 그 발밑 강물
사각지대
-기생충
일순 비틀거나 굴절 끝에 부러뜨리는
잉여와 이질과 타자의 사각지대
뒤집다 흔들어대다 부여잡으려 한다
도드라진 카메라 시선 검은 폭력의 욕망
바나나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한 사내
미친 듯 웃어대는 소리 지하 벽을 울린다
광기어린 살인마 기묘한 저 춤사위
철저히 가둬버리고 야만의 피를 끓이는
폭압에 굴절된 벙커 불빛 새어나나간다
사라오름 복사뼈
거기에 그렇게 고여 있을 줄 몰랐다
사라오름 맨 꼭대기 둥그렇게 패인 곳
못불에 두 발 담그고 잠겨갈 줄 몰랐다
온몸으로 뛰어들자 온몸으로 받아 안는
사라오름 옥빛 못물 넘칠 듯 출렁일 때
희디힌 밴발의 복사뼈 구름밭에 닿았다
종달리
끝에 이르러서야 성산 일출봉을 본다
끝이 아니구나 정녕 끝이 아니었구나
종달리 둥근 당근밭 혼자 중얼거린다
가던 구름이 잠깐 당근밭에 내려오자
그곳에 집 한 채 들어서는 것 보인다
한끝에 이르러서야 다시 철썩이는 파도
노르망디
그는 마침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당신이 발 딛고 선 언덕에 닿기 위해
해변에 배가 멈추자 모래톱을 닫는다
노르망디 노르망디 꿈에도 그리던 곳
당신이 발딛고 선 언덕이 나타나자
해맑은 웃음소리가 창공을 깨트렸다
석류꽃 호랑나비
한 순간 꽃송이에
앉았다 떠난 호랑나비
꽃은 떨면서 잠시
아래위로 흔들렸네
천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그 입맞춤
잊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