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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영
전남 보성 출생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초록몽유>, <목이 긴 꽃병>, 현대시조100인선 <말랑말랑한 방>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무등시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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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凝視)
한 겹씩인 추운 봄이 가파른 산 능선을 잇고
가난한 집 밥상에서 수저들이 부딪히듯
깡마른 빈 가지 덧댄
움들이 다투어 필 때
목숨마다 고리지어 사슬 끌듯 아린 시간
왼쪽 날개 부러져 검불 속에 숨어든 새
울음이 봄 숲에, 마음에
칼금을 긋는다
거울이 거울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명약(名藥)이라는 시간은 점점 더 어두워져
저 울음 그치기 전에
나는 가지 못한다
제5 마네킹
불 켜진 환한 길들 리본으로 묶이고
흘린 밥알 다시 주워 입에 가져가 듯 맘은 있다 맘은 없고
찬 손만 남아서 뒤돌아 볼 수 없어, 주먹도 쥘 수 없어
관절을 다 꺾고 접어 비명을 꽃 피운다
야광별이 빛나는 밤에
햇볕을 밚이 봐야 더 오래 반짝인다
별빛의 모서리에 별이 하나 발을 걸치고
한 번도 빛난 적이 없는 별, 내 옆에 또 네가 있다
나팔꽃씨
살아서 이토록 멀리
한 음을 찾아 가네
불 켜진 너의 창가 눈앞이 흐려지고
모가 닿은 까만 시를 언 땅에 꽝꽝 묻어
키워온 눈덩이 같은 한 마디도 마저 묻어
첩첨히 닫혔던 문과 창들 열리면
마약의 밑바닥에서
무정을 건져오겠네
불루를 찾아서
다음 정유장에서 내릴 게요. 이제 더는 혼자 못 가 둥그런
어느 해안에 내 한 몸 던져야만 주름 집 그 안에 피신한
굳은 혀가 풀리는
오만삭신 병들로, 가짜들로 숨 막힐 때
하늘을, 바다를, 긴 절벽을 그릴 때면
던진 돌 떨어지는 선으로 스치며 날아갔지요
내 자리를 삯전으로 파랑에게 맡기려는데 꿈을 가려버려
눈동자를 둘 데가 있나요. 남겨진 한 방울을 더 짜내려
너의 목을 조르고픈
무월마을 외딴 집
끈 떨어진 연을 밤마다 주우러 가는
미풍이 섞여 오면 혼자 울기 더 좋은
녹 슬은 함석지붕 아래에서
빗줄기를 바라본다
하루를 꼬박 굶고 냅킨 위에 쓰는 편지
달도 없는 어둠 속에 무수한 빗금들
이생은 글렀다 다 틀렸다
비문처럼 새겨지는
징징징 귀가 울어 더 먼 데로 가고프나
움푹 꺼진 베개를 토닥이다 눈 감으면
간절히 누가 부르는가
발뒤꿈치가 들린다
해변의 탄생
피 묻은 엉덩이를 때려 울음 끝 첫 숨을 달듯
잡혀진 깃털 하나 출발선에 세워주니
완주할 선명한 먹선을, 결승선을 그어야하는
11시 11분
시계를 바라본다. 우연한 11시 11분
간절히 한 사람을 생각한다는 그 속설의.....
혼자서 울기 참 좋은
소나기 날 빗 같은
끝내는 가 닿고픈 한 사람의 결이 있어
나란히 촛불 속을 걸어 나온 영혼처럼
가까운 죄 같은, 재 같은
운명을 점쳐본다
2월
맹세하며 내걸었던
짧았던 새끼손가락
이가 빠진 꽃 그림자
추신처럼 숨이 짧고
생일날 세 번을 울고
하루가 다 기운다
젖은 구두 한 짝
영원과 가장 먼데서
한 호흡이 완벽했다
이지러진 당신과 꽃대가 상한 나여!
타이어 자국을 씻어내려 밤 빗속에 서있었으니
뒤축 다 닳은 반달로
서로에게 이울어
길 더듬는 호흡으로 주름지며 우묵해지며
그믐의 빛과 어둠을 함게 나눠 먹여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