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
탐라산수국 / 오래된 정원 / 해피엔드 / 개들의 시간 / 어시장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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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산수국
손영희
네 거처를 찾아가는 나는 파랑 나비
무심을 되새김하는 소잔등에 얹힌 나비
안개는 분화구에서 전설처럼 피어오르고
네 들숨 내 날숨으로 하늘 그물 엮어서
목동아, 우리 지극한 사랑이 될 양이면
저기 저 쏟아 놓은 별 지금 막 승천 중이니
오래된 정원
아궁이 불쏘시개 지천으로 널려있다
구름이 새를 좇는 장복산 편백나무 숲
아침녘 수제비 떠 넣는 무쇠솥이 끓고 있다
어머니 몸 그 몇 배 높이 쌓은 성채 하나
살신殺身을 꿈꾸는 조붓한 저 등허리
산 하나 통째로 이고와 햇살로 부려놓는다
잘 썩은 고요와 잘 마른 그늘이
오늘도 까시래기 내 배냇잠 부풀린다
큰 손이 떠먹여주는 밥맛이 뭉클하다
해피엔드
퇴근길 나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간다
어둠이 무릎을 덮는 H열 1번 자리
마음이 골목 같아서 외등 하나 켜고 싶은 날
가보지 않은 생은 언제나 해피엔드
폭풍 같은 어제와 실뱀 같은 내일이여
누선에 고이는 물기
흔들리는 엔딩 씬
개들의 시간
나를 깨우는 건 늙고 목쉰 회화나무
머리 푼 잡귀들이 목줄을 잡아당긴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목청을 소진하면서
그렇게 지켜냈다고 다시 살아났다고
맹목의 순정을 위해 꼬리 저리 흔드는
꿈에서 나를 깨우는 건 내가 먹어버린 나
<시조매거 2015. 상반기호>
어시장 백서
가랑이 벌리고 앉아 비늘을 깎고 있는
어시장 바람 난전 고무바지 저 여자
먹다 만 점심 쟁반이 타인처럼 놓여 있다
주름진 목덜미와 이마가 반짝이고
무표정한 사타구니에 소금꽃이 피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비늘들이 밥이다
몇 마리 더 깎아야 날개를 달게 될까
학자금 밀린 방세 궤짝마다 쌓여 있어
비릿한 어깨통증을 일수 찍듯 다독인다
<유심 2015. 5월호>
손영희 시인
200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불룩한 의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