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
귀여운 협박/ 떡갈나무 / 달팽이의 별 / 이하역 산국 / 내 몸은 오른쪽으로 기운다 /
긴머리 날리며/ 원기소 / 오독의 시간 / 안테나 / 솟대 / 동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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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협박
손주 사랑 끔찍한
팔순의 어머니도 가끔
네 엄마기 전에
내 딸이다 이눔들아
힘들게 하지 마라 내 딸
할미 가만 안 있는다
떡갈나무
포장도로 끝나자 이어지는 황톳길에
크지 않는 떡갈나무 속잎들은 자라서
벼락 친 흍터 자리엔 아직 속내 타고 있다
여물 통 같은 생을 휘어지게 부여안고
가지 많은 큰 나무 바람 재워 거느리신
어머니 그 마른 젓가슴 오늘 다시 만져본다
달팽이의 별
둘이어도 저마다 그저 외로운 지구에
둘이어서 아름다운 달패이부부 세들어
톡 톡 톡 짓고 허무는 나긋한 손의 대화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르는 듯 가는 세상
어둠에 사무친 남편 등에 업혀서
빛으로 지어 올리는 아내의 꽃잎밥상
기다리을 잊은 세상 기다리을 쥐어주며
촉촉한 봄날을 화안하게 밀고 간다
험난한 지구 모퉁이 돌아가는 저 점화(點火)!
이하역 산국
중앙선 비둘기호 이하역에 내려서
학교 가는 다리께 개구리 울던 연못 하나
기찻길 넘어서 가면 골짜기만한 우리마을
밤이면 달빛이 쏟아지던 산모롱이
종지처럼 터트려 노랗게 웃고 선 너
물밀듯 산골 유년이 와락 품에 안긴다
내 몸은 오른쪽으로 기운다
주먹만 한 덩어리 물혹을 떼어내고
빈자리 그 쪽으로 몸이 가만 기운다
허전한 마음을 괴어도 기우뚱거린다
나를 미처 내가 사랑하지 않은 죄
몸의 말에 미처 귀 귀울이지 않은 죄
그 죄를 후려치고 가는 무의식의 기울기
저 조그만 여섯 살 알고는 있었을까
옛집 한쪽에 걸린 낡은 사진 속에서
십오도 오른쪽으로 기운 단발머리 보인다
긴머리 날리며
몰아치는 태풍에 놇친 배 사가라고
트럭은 반나절 확성기 열어놓은 채
뜨거운 농부의 꿈을 봉지째 팔고 있다
그 여름 단비와 헐감의 햇살에도
제 몸 오래 달이던 어느 낙과의 비애처럼
내 안에 매달린 시들도 후두국득솎아낸다
원기소
상수리 구르는 소리 톡, 토르르 들려오고
송소종택 뒤울 너머 황새 떼 날아들어
휘도록 나무마다 한철 흰 꽃송이 앉는 마을
어머니는 발틀 돌려 해진 옷 손질하고
속살 다 비치도록 고무줄머리 묶은 아이
갈색 병 원기소 몇 알 아작아작 깨무는
손짓발짓 간지러운 고소한 유년이 오면
칠순의 어머니도 팽팽하게 돌아오고
재몽틀, 기차 가는 소리 오손도손 쏟아진다
오독의 시간
과일 드세요 어머니
얘, 나는 괜찮다
따끈한 파지에요
얘, 나는 됐대두
그 말씀 그대로 받아, 들고 나은 이레 해
얘들이나 챙기라는
오랜 말의 층층에서
어머닌 또 얼마나
섭섭하게 내려왔을까
오독의 시간을 지나 말귀 이제 트인다
안테나
창공에 찌 던지는 옥탑 위의 안테나
몰려들던 새 떼도 우루루 날아간 뒤
비바람 들이친 세월 저도 몰래 휘었네
호령도 흐드러져 너른 세상 굽어보며
한 시절 몰아 보낸 아버지 뒷모습처럼
찡하게 가슴 후리는 유물 한 점 서 있다
솟대
신사동 가로수길 전광판 홀로 외롭다
소음에 오존 수치 쿨럭쿨럭 뱉어내며
도시의 찬 이마를 짚는 손이 하나 서 있다
사느라 바쁜 도시 몇 도에 몇 부일까
앞만 보고 닫는 우리 낮은 체온을 읽는
저 솟대 쓸쓸한 진맥에 하늘이 죄 흐리다
동전 소리
민화투 수다패 두고 방금 돌아온 어머니
뜨개질 동전 지갑 버선목처럼 뒤집고
하나, 둘,
세는 소리에 저녁이 건너옵니다
아들 딸 자랑하다 눈이 먼 동전들이
앞뒷집 할머니 무료한 시간을 끌고
두 평 반
어머니 고요도 짤랑, 흔들고 갑니다
권영희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2007년 《유심》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사화집『바람으로 가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