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겨울, 숲에 들다/ 장독/ 산위에서/ 달팽이/ 여행/ 책/가을 강/ 복사꽃/ 사건/
=====================================================
겨울, 숲에 들다
우화하지 못한 꿈도 여기서는 아름답다
바람이 전해 주는 맑은 수화 속에
빈 가지 여린 끝으로 소금 꽃이 피고 있다
끌고 온 신발들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무채색 고요 속에 걱정도 다 내려놓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음 귀를 열어간다
싸락싸락 눈 내리고 시방은 적요한데
아직도 펄펄 끓는 내 욕망은 붉디붉다
얼마를 더 벼리어야 이 고요와 벗이 될가
장독
햇살 바른 장독간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꽃물 든 신혼살림 옹기종기 늘어갔고
매서운 시집살이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첫새벽 물을 길어 정갈하게 받쳐 놓고
세상의 고운 것들 모두 불러 모아서
가득한 성찬을 위해
날마다 기도한 곳
이제는 폐광되어 언저리에 금이 가고
감나누 한 그루만 그 곁을 지키는데
쓸쓸한 수묵화 한 점
국화꽃이 피고 있다
산위에서
산의 호명 받아 꼭대기에 올라 보면
내 살아온 내력들 서리서리 내려와
두레상 앞에 놓고서 초록 경전 읽고 있네
각진 일상의 모서리 다듬으며
떠나는 시간의 옷자락도 잡으며
바람이 전하는 말의 덧없음도 느끼며
성서 몇 구절처럼 미더운 마음자락
비워낸 그 만큼의 향기로 가득 차서
내 다시 느껴 알겠네. 은혜로운 이 천지를
달팽이
느리게 걷는다고 나무라지 말아라
오직 땅에 머리 숙이고 세상을 경배하며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건너가는 이 하루를
맡아야 할 짐 있다면 스스로 등에 지고
순명의 계단을 향해 기어가는 그대여
외로운 사제의 그림자
언뜻 겹쳐 보이나니
여행
마른 손 하나로 따가운 햇살 가리며
거미줄 같은 일상 애써 눈 감으며
미지의 낙원을 찾아 초점을 맞추고 간다
어디나 닿는 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
안으면 포근해지고 버리면 차가운 인정
돌아와 배낭을 풀면
아, 정겨운
내 자리여
책
비어서 더 적막한 간이역 같은 바위에 앉아
바라다 본 하늘은 한 권의 책이다.
몇 장을 넘겨 보아도 가없는 사색의...
채석강 단청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말씀의 바다여 바다의 잠언이여
금강경 한 구절 같은 파도가 나를 때린다
가을 강
절벽 같은 목마름이 불빛으로 타고 있다
객기도 결이 삭아 곱게 익을 세월이건만
마지막 컨타타처럼 저리 붉게 흐르고 있다
지상에 살았다는 흔적 남기려고
누가 어등魚燈처럼 어둠 속에 서 있는지
강물은 울컥거리며 하염없이 가고 있다
복사꽃
그리움의 부표같은 복사꽃이 피었네
가슴 환한 두근거림 바람곁에 실려와
비 젖은 가지 끝에서 사르르 눈을 떠네
한참을 달려오다 문득 뒤돌아 보면
날려 보낸 연처럼 그리운 얼굴들이
커다란 웃음을 물고 둥근 하늘 열고 있에
사건
이십일 세기 쪽방촌 두 평짜리 고시텔
월세 이십만 원이 못굼으로 타던 날
대낮에 서울 한복판 기러기 가장 떠났다
"방학하면 우리하고 수영장 가자 했잖아"
아홉 살 쌍둥이 딸 손가락 걸고 한 약속
아직도 불길 속에서 하냥 타고 있는데
아픔이 출렁이는 TV영상 앞에서
사람들은 그 흔적을 자꾸만 쓸어담고
어두운 커튼을 내린다. 무거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