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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김미정 시집 <슬픔의 뒤편> 등록일 2022.08.07 21:14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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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요한 둘레> <더듬이를 세우다>
현대 시조 100인 선집 <곁>이 있다. 제5회 <이영도문학상> 신인상, <대구문학> 작품상, <대구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 <시조21>, <대구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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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뼈대만 부여잡고 온몸으로 버티었지

바람길 열어주고 소리로만 텅 비었지

뒤편을 허락하지 않아 그늘에도 밟혔지

온몸으로 버티었지, 뼈대만 부여잡고

소리로만 텅 비었지, 바람길 열어주고

그늘에 밟히곤 했지, 뒤편 허락하지 않아

배후

궁금한 것들은 늘 뒤편에 도사린다
조종당한 순간마다 뒤틀린 몸의 각도
등으로 울고 웃던 흔적, 감춰둔 허물까지

무작정 기다리던 당신의 등 뒤에서
밀어낸 걱정마저 땀방울에 휩싸일 때
가만히 물러서지 않는 무뚝뚝이 돌림판

손닿지 않는 그곳 물무늬가 차갑다
빙글빙글 돌아서 떄 없이 붉어져서
중심을 더 낮게 잡아도 드러내지 않는다

지문

손가락 마디마디
굳게 새긴 마음무늬

또렷했던 그 무늬
햇살 따라 풀어져서

닳도록 믿고 싶었던
기억마저 흐려져서

내가 나를 증명 못한
한순간 뼈저리다

번번이 거절당한
낡은 지문 밖에서

시간은 또 누구 편에서
손 흔드나, 해맑게

슬픔의 뒤편

속들이 무너지고 무너져 새어나온
깊이를 묻는 그늘, 흉터만을 남긴다
종족을 알 수 없어서 쓸 수 없는 연대기

드러난 순간마다 무형의 틀에 가려
기다리면 사라질까 한 걸음 뗄 수 없다
배후를 찾아갈수록 외딴섬만 보일 뿐

동행

'속도' 보다 더 값진 '함께' 그린 그림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휠체어를 돌린다

바큇살 사이로 퍼지는 햇살, 꼬리마저 흔든다

문외동

기억은 문 밖에서 저마다 흩어졌지

안쪽은 촘촘해도 바깥은 헐거워져

눈 감아 떠오르는 금호강, 그마저 흘려보내고

동문 밖 눈 익은 자리 한 그루 회화나무

모두가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아도

아주 먼 그늘을 드리워 그렁그렁 맴돌지


경주

시간은 이곳에서 머문 게 분명하다
속들이 빛을 바랜 풍경은 풍경대로
천년에 천년을 더해도 꿈쩍 않을 서라벌

집집이 봉분에 기대어 사는 도시
출토를 기다리는 언어는 모두 꽃이다
무너진 성벽 더듬어 헤아리는 흙 무늬

불국의 영토에서 이어온 탑 그림자
층층이 뿌리내려 심어둔 가락이다
시절에 갇히지 않는 무현금의 노래다

조응

오른쪽 콘트라베이스 나지막이 다가오고

플루트와 오보에 맞물려 떠오르면

황금빛 강물에 펼치는 울림이라, 어울림

객석에 흘러내린 선율은 빛이 되어

무대로 날아오른 너와 나의 그림자

고요한 그 숨결까지 울림이네, 어울림

헌 의자

때 묻고 낡아지도록 반들반들 닦았지
머물고 싶던 안쪽 아껴둔 체온으로
드나든 시간의 갈피마다 삐걱대는 뼈마디

덧대지 못한 기억 되박아서 아물지
제 몸속 기대어 숨죽인 파열음이
조각난 반그늘에서 얼룩처럼 번지지

때때로 새로움이 익숙함을 밀어내어
지워진 지문 아래 촘촘히 파고들어도
처음은 그 끝을 물고 오래도록 감돌지

한 번도 잊은 적 없는데

올곧게 육십 년, 챙겨온 결혼기념일
그렇게 한 번을 잊어본 적 없는데
귀퉁이 녹아내리며 고장이 난 기억창고

나란히 발맞추면 벼랑 끝고 마다않던
그 오랜 그림자가 까마득 뒤엉켜서
아슴히 이지러지듯 한 걸음씩 지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