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동강할미꽃/ 사북, 그리고 읽다/ 섭지코지 1/ 장마/ 빈집의 화법/ 진도/ 숟가락을 드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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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할미꽃
그 무슨 절망 깊어 저 바위 뚫었을까
막장 속 피눈물도 꾹꾹 참은 멍투성이
묵은 잎
링거를 꽂고
지켜낸 세상 한쪽.
사북, 그리고 읽다
한밤중 석탄열차 소스라쳐 달아난다
채굴된 첫 페이지 속독으로 읽어버린
철로엔 씻기지 않는, 문장 한 줄 놓인다.
추락한 뭇별들은 어디서 노숙을 하나
카지노 네온사인 해발 천 미터 근처
떠밀려 다시 흔들린 누구의 막장인가.
함부로 말하지 마라, 어깨 맞댄 나무들
간신히 갱도 밖으로 꽃잎 다 흘려보낸
산수유 벼랑에 찍은 십구공탄 옛 불빛.
섭지코지 1
밤하늘 훔쳐보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한 입 크게 베어 물던 '보름달'카스테라
가슴에 얼른 받아든
그것도
팔월
보름.
장마
산수국 꽃잎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있다
세상에 멍든 상처 하나쯤 숨겨두고
한 번씩 숨넘어갈 듯 바다 향해 울었다.
당신은 띄어쓰기도 없이 눅눅한 시를 쓰고
그만 꽃은 피어서 나는 울지 않아도 된다
불현듯 번지점프다, 꽃잎 끝 눈물 한 방울.
빈집의 화법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적 있었다
감물 든 서쪽 하늘 물러지는 초저녁
새들이 다녀가는 동안 버스가 지나갔다.
다 식은 지붕아래 어둠 덥석 물고 온
말랑한 고양이에게 무릎 한쪽 내어주고
간간이 떨어진 별과 안부도 주고받지.
누구의 위로일까 담장 위 편지 한 통
'시청복지과'주소가 찍힌 고딕체 감정처럼
어쩌면 그대도 나도 빈집으로 섰느니.
직설적인 말투는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는
그대는 기다림의 자세, 가을이라 적는다.
진도
딱딱한 가슴으론 그곳에 가지 못한다
아무리 무릎 꿇어도 닿지 못한 바다여
어린 손 손톱에 박힌 비명들이 둥둥 떠.
무수히 긁어대던 차가운 물의 나라
눈물은 눈물대로 분노는 분노대로
서로의 등을 기댄 채 촛불 켜든 사람들.
사월에서 가을로 슬픔은 목이 길어
부끄러운 나의 시도 가라앉은 바다 속
팽목항 가슴 한 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숟가락을 드는 봄
사월 어깨너머 푸른 저녁이 온다
이 빠진 사발처럼 걸려있는 초승달
누구의 가슴 한 쪽이 저리 시려 오는지.
그림자 빛을 가두며 내 뒤를 따라 온다
한 걸음 딛고 나면 달아나는 발자국
온 섬을 불 지르고 간 그 날에 가 닿을까.
꽃이라 불렀지만 눈물이라 읽힌다
제주 땅 어디에나 울먹울먹 피어나
뿌리 채 흔들고 간다, 내가 모른 봄 저편.
눈물은 그런 거여 퍼내도 우물 같은
함께 올 줄 알아야 세상을 배우는 거여
늦저녁 숟가락 하나
눈물 한 술 뜨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