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각시붓꽃/ 먼지버섯/ 옛 등대로 오라/ 용두암/ 산수국/ 가을 편지/ 여름파장/ 나의 행간/ 신제주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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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붓꽃
올봄엔 각시붓꽃도 폐경기였나 보다
광이오름 골짜기가 집 몇 채 흘려놓고
팍팍한 흘천변 거너 작은 붓대 움켜쥔다.
비닐하우스 한 편에 몰래 날아든 종달새
극락조 잎줄기 사이 둥지 하나 세를 내고
갓 낳은, 몇 줄 시 같은
새알들을 품고 있다.
나는 이제 써야 한다
붓꽃도 각시붓꽃
간밤 꿈엔 오랜만에 어머니 찾아와서
이 세상 못다 쓴 일기 청보리로 치워낸다.
먼지버섯
그래도 목마르거든 묻지 말고 가시랴
누구의 찬송 같은 주일 오후 산새소리
장마철 내 옷에 아득, 그 얼굴이 보인다.
기약도 포자처럼 훌훌히 사라지면
나는 또 어느 숲에 한 목숨 놓았다가
눈물빛 새 소리에도 공연히 부푸는가
성가신 사랑니 같은 십년 된 중고냉장고
모터를 갈아 끼워도 툴툴대는 이 그리움
별똥별 한 획의 하늘, 내 앞에 길 세운다
옛 등대로 오라
여태껏 못 떠났나 제주항 저 방파제
금채기 해녀들을 다 가둔 바다가
산지천 거슬러 와서
등대로 핀 쇠별꽃.
애당초 그 불빛들은 승선하지 않았다
사라봉에서 별도봉으로 바닷길만 감아 돌던
잘 가라 허기진 청춘
다시 못 올 이 세상을.
누가 나를 매었나 항구의 비트에
연삼로 왕벚꽃 훑고 간 상끌이선단
먼 바다가 불빛 하나가
속절없이 나를 끈다.
용두암
꿈꾸는 사람들은 용바위를 안고 산다
수평선 눈높이로 손가락을 걸었던
그 멍에 경매에 부쳐 겨울 파도에 싯기고
유채꽃 그 뿌리로 용담동에 찾아왔다
터 잡은 늙은 어부 흔들리는 일상에도
외끌이 매어둔 바다 갈치바늘 반짝인다
끌어라 외끌이여, 샛바람을 끌어라
승천을 저당잡힌 용두암이 꿈틀댄다
천년의 팽팽한 닻줄 시방 툭 끊고 싶다
산수국
기도처럼 피어나는 유월 숲 속에는
옥양목에 베인 손 쪽빛으로 물들고
몸 낮춰 옷깃 세우며 그대 향기 고인다
열엿새 기운 보름 끝을 잡고 열린다
인연의 뿌리 찾아 거슬러 오르면
산하나 묻어둔 가슴 발밑으로 잠긴다
천년의 그 약속 기다림에 나선 길
겨울 강 풀리는 틈 아니 풀리든 말든
날 세운 호미 자루에 휘감기는 뿌리로
보인다, 성서 속의 그 별이 보인다
내 온실 묘판 위에 잘 자란 불빛으로
숟가락 마지막 온기 꽃잎 새에 맺힌다
가을 편지
떡갈나무 밑둥치 눈 시리게 새기던
마른 꽃 언저리 마른 냄새나는 이름
들녘의 사금파리로
내 손등을 찍고 싶다
햇살 한 움큼이 목젖으로 숨어든다
남문통 그 골목에 차압당한 노을이
철대문 딱지 붙이듯
내 가슴에 붙은 딱지 .
여름파장
한여름 꽃잎에도 복병처럼 가을은 있다
주일날 성당에 못간 철 이른 코스모스
현금도 추스르지 못한 때 절은 여름은 간다
젊은 애인 고백이다 순명하는 저 차도 변
판자로 덧댄 길에 못 자국이 녹슨다
바다는 아침녘에야 간신히 파장한다
밀물로 든 포구 목젖까지 차올라
받을 도시 하나 없는 장미 목을 잘라낸다
한 세상 폐기처분된 검붉은 가시가 된다
나의 행간
다호동 꽃마을 비행기 뜨고 내리면
오늘도 또 피었다, 거베라 저 망할 것
까치들 총포소리에 시위하는 날갯짓
하늘이 부친 경매 너를 낙찰 받은 거다
거베라꽃 피는 사이 제대 앞둔 아들아
오너라, 저 거친 불배 향기로 뜬 이 포구에
신제주 나팔꽃
용케 살아 있었구나
늦가을 이 새벽에
어느새 농장까지 먼저 와 있었구나
비행기 뜨고 내리듯
또 피고 지는구나.
근조화도 못되고
꽃다발도 못되고
그래서 미안한지 돌담 곁에 비켜서서
한 세상 밥값을 하듯
뱃고동 소리 피워낸다.
사철나무 생울타리
한낮을 떠메고
예닐곱 햇살 같은 내 그리움 떠메고
밤마다 대문을 걸어도
되살아난다, 이 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