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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윤정란 시조집 <너는 나와 달라서> 등록일 2023.06.08 19:47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380




너는나와달라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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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살고 있다.
1983년 <시조문학> 추천완료로 등단했으며,
시조집으로 <지금은 어떠세요> <뿌리가 이상하다>
<꽃물이 스며들어> <푸른 별로 눈 뜬다면>,
시조선집으로 <너 참 잘났다>가 있다.
성파시조문학상, 경남시조문학상, 진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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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붉은 피다
절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도
노래도
한꺼번에 떠올라

이 가을 사르는 목숨
퍼마시는 독주다


다랭이 논


당신이나 나나 졸업장 없이 산 거야

산을 뜯어 햇살 넣고 파도에 노래 실은

백팔 층 다랭이 논이 백팔번뇌 사른 거야


벼랑가에서


바람 센 벼랑가의 소나무가 되라니
천 길 절벽에서 어쩌라는 것인지
발끝에 온 힘을 모아 하늘 받들고 섰네

그냥 확 뛰었으면 새가 되어 갔을까
천둥 번개 맞서다 꺾어지고 뒤틀려
좋은 게 좋다 하지만 옹이 깊이 박혔네


세상이 변하는데 기댈 언덕 하나 없이
잘못 든 길이라도 못 이룬 꿈이라도
괜찮아 다시 시작해 하늘 저리 푸른데



별 하나 앞세우고


흙 묻은 손가락이 새파랗게 눈 떴다
호미와 연필 사이 언어와 풀잎 사이
꽃대를 밀어 올리는 별 하나 앞세우고

언제쯤 단순하고 아이처럼 순수할까
타고난 품성대로 흙이 되고 물이 되어
맛있게 꿈꾸는 동안 달이 지고 해가 떴다


너는 나와 달라서


가만 들여다보면 하늘 감춘 두루마리
말들이 흘러넘쳐 흘리는 동틀 무렵
하나도 붙들지 못한 숨탄것의 목소리

그냥 사라질까 영감의 손 덥석 잡고
미명에 돋는 시어 마음 안에 가두면
파랑새 한 마리 들어 초장 물고 나온다


늦게 만나 끓는 피 달이는 새벽이면
그 하늘 풀어내는 사연도 갖가지라
한 그루 나무도 서서 초록 잎을 내민다


이팝꽃


얘야 밥 먹자 소복소복 피어나는
어머니 목소리 봄볕으로 둘러놓고
이팝꽃 하얀 봉오리 고봉으로 웃는다


어지러운 하늘은 눈 감으면 그만인데
힘없이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을 때
보리밥 고봉 한 그릇 이밥인 듯 나눠 먹자




길가의 돌맹이를 별이라 부르던가
빛을 내지 않으면 별이 될 수 없듯이
별 하나 가슴에 들어 꽃꿈을 꾸게 한다


나는 언제 누구의 별이 된 적 있었나
비웃고 무시하며 상처 주지 않았는지
마음의 별빛을 모아 네 눈이 되고 싶다


벚꽃


너에게 닿으려고 혼도 훌훌 태워버린
새하얀 종장처럼 날아드는 꽃잎들
하르르 날아올라서 눈의 눈을 열겠네

귀 막고 입 다문 기막힌 세월 건너
사랑이 아니었음 족쇄 어찌 풀었겠냐
해마다 햇살 풀어서 전하겠네 새봄을


 
외등


다 늙은 어머니가 골목길을 밝히네

가는 목 쭉 뻗어서 어둠을 지워가며

아직도 오지 않는 이 기다리며 서 있네


보고 싶다 빨리 오라 채근하지 않아도

차마 너를 두고 잠들 수 없다면서

붉은 눈 글썽거리며 밤을 지켜 서 있네


아침밥을 짓다가


아침밥을 짓다가 황소 울음 듣는다
쌀알의 지문 속에 배어 있는 땀방울
아버지 평생이 깃든 그 사랑을 먹는다


껍데기만 남기고 속살 다 내어주듯
밥이다 하늘이다 가슴 치는 돌이다가
문명의 행간에 몰려 꿈틀대는 꿈 하나


자기를 세우려고 앞에 나선 적 없이
또 다른 삶을 위해 길을 튼 순수 앞에
오늘도 머리 숙이고 늙은 귀를 늘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