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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박기섭 시인 시집엿보기 등록일 2019.12.30 11:08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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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千秋)

 

 

 

내게 봄이 다였다면

 

어인 꽃이 피리

 

 

하늘 소금밭에

 

천둥 번개가 오리

 

 

살과 피 다 삭은 천추(千秋),

 

눈먼 별이 뜨리

 

 

서녘의, 책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꽂이 한쪽에

낯익고도 낯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세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먹활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등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산녘의 봄

 

 

살구꽃이 간다커늘 복사꽃도 안달이다

 

분이 잘 안 먹네, 연신 투덜거리며

 

행여나 늦을까 보아 먼 산 동네 잔칫집에

 

봄눈이 느지막이 외갓곳을 다녀간 날

 

들매화 수유꽃은 기별 먼저 닿았던가

 

여녹은 개울가에서 하마 귀를 씻는다

 

새경도 못 받은 채 좇겨난 그해 그 봄

 

꽃샘 잎샘인들 괜스레 힐난질일까

 

낮꿩이 울다간 앞섶꽃지짐을 부친다

 

 

꽃의 서사

 


 

꽃의 하복부엔 범람의 기억이 있다
전력 질주 끝에 터지는 모세혈관
겹겹이 오므린 시간의, 그 오래고 먼 기억


피를 흘리면서 황급히 피었다가
피를 닦으면서 서둘러 지기도 하는
꽃이여, 널 곳도 없는 그대 전라의 무게여


꽃의 낮바닥엔 짓무른 자국이 있다
신음을 삼키면서 혀가 혀를 물고
쥐었다 놓는 순간에 바스러지는 꽃의 서사

 

 

 

그리고, 봄

 

 

 

흑묵(黑默)의 긴 폐도를 간신히 빠져 나오는

 

 

그 순간, 꽃은 핀다 온 힘을 다한 봄이여

 

 

몸속의 얼음 조각을 언 입술로 물고 있는

 

 

 

꽃이 지기로서니 


 


그대, 참 무한정의 기다림 끝이로다


홀로이 이 한 봄을 대질러도 보건마는


그런들 어쩔 거냐고 꽃은 피고 또 지고


꽃이 지기로서니 피값마저 에낄쏜가


그대, 기다리다 저문 날의 저문 피값


생멱살 잡힌다 한들 봄이 이냥 간다 한들


 

 

서귀포

 

 

서(西)으로 가다는 말고 머뭇대는 구름 한 점

 

그, 왠지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

 

뉘 필생 일고 잦더니 너 예꺼정 따라왔구나

 

한뉘를 떠 흘러도 한낱 눈썹 끝인 것을

 

애먼 봄이 놓쳐버린 외돌개 하늘 가녘

 

고 턱밑 부스럼 딱지를 여태 떼지도 못했네

 

 

감나무와 뻐꾸기

 

 

나 살아 나 생전의  마당 가에 서 있다가

나 죽은 뒷날에도 등불 들고 따라올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저 감나무 저 가지는

 

나 살아 나 생전의 눈썹 끝에 와 울더니

나 죽어 저문 길도 멀다 않고 따라올까

그러면 그럴 것이다 저 뻐꾸기 소리만은

 

뻐꾸기 갈아 놓은 먹물 받아 먹감 되고

그 먹감 떫은 맛에 뻐꾸기 목을 풀지

한목숨 울먹인 값이야 한 톨 감만 한 것이니  

 

 

 

탈북

 

 

북이 찢어졌다 북의 몸속에서

웅크렸던 소리들이 찢어진 북을 안고

더 이상 울지 않는 북, 그 북을 탈출했다

북편 채편 가로지른 강물도 철조망도

일순 흩어지는 소리들을 막지 못했다

버려진 북채 너머로 먼 총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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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섭

대구 출생.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키 작은 나귀 타고』 『默言集』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엮음 愁心歌』 『달의 門下』 『각북(角北)』 등, 공저 『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 『머리를 구름에 밀어 넣자』 『80년대 시인들』, 시평집 『가다 만 듯 아니 간 듯』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백수문학상,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