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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숙
제주출생
2000년 <열린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가시낭꽃 바다>, <장미 연꽃> , 현대시조 100인선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시조시학 젊은 시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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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놓치는 건 네가 아닌 내 안의 시월이다
참빗살나무
참빗처럼 나뭇잎을 파고드는 햇살에
한라 능선 차오르는 치렁치렁 머릿결
언젠가 마주친 소녀 빛나던 이유 알겠다
어머니 나를 눕혀 서캐를 고르시던
그 손길 설핏 든 잠, 홀로 깨어 서러운 날
땀 냄새 절은 머리칼 참빗살나무 근처다
몇 번을 멈칫대다 끝내 찾지 않은 집
수직의 돌계단 산정 아래 이르러
푸르름 순명으로 받드나 붉게 익는 열매들
하논*
부름에 대답하듯 발걸음을 놀는다
아득한 새 지평의 또 다른 섬에 닿아
가만히 귀 기울이니 풀벌레 소리 가득 차다
뉘엿한 가을 들녘 그림 속에 빨려 들어
오만 년 전 물길이 간곡하게 이르는
세상의 근본을 열어, 한 끼 밥 뜸 들인다
* 분화구 안의 논, 습지와 샘이 있다
술팽랭이 꽃
짐을 싸 나갔던 바람 수몰지로 와 휩쓸리네
가을이 당도하여 더 간질한 피붙이들
제방 위 내리는 하늘, 툭 찔리는 손눈썹
경전
관음사 숲길 걷다 눈에 띤 짐승 발자국
접질러 중심 잃듯 철렁 가슴 내려앉는다
태풍에 뿌리 뽑힌 나무, 둥치 속 두려움 같을까
부처 찾아 올랐다는 순례길의 헛웃음에
곧게 뻗은 삼나무, 밝히는 단풍 외경에
뒤 미쳐 겨우 깨치는, 또 하나 내 안의 짐승
바람의 날 4
-억새
우, 우, 우 이명의
울음을 삼킨 들녘
한 번 더 받들어야 할
돌투성이 자갈 밭
닳아져 벼리던 날들
푸르게 살아,
살아있으랴
감물 옷
가시덤불로 쏟아지는 칠월의 불볕엔
흰 광목 치댄 감물 게운 숨 돌릴 새 없이
밭일로, 바당 물질로 한 몸뚱이 타들었다
등줄기 흐르는 땀 눈자위 흐릿하고
맨발바닥 딛고 선 땅 거칠어 사무치는
어머니 일어서는 몸 배겨든 감꽃물색
망초꽃
허공도 바다도 건너 예까지 따라왔네
허리께 주춤 다가와 옷깃을 잡아끄는
한 하늘 사람의 동네, 바람결도 익숙한데
잠시 네게 벗어났다고 외진 마음 도졌을까
먼 나라 숙소 모퉁이 산 그림자 내리는
간간이 흩뿌리는 비 날 달래는 꽃망울들
접시꽃
한여름 뒤뜰에 놀러온 사촌언니
할머니 둥근 질그릇 가득 받아 데워진 물
새까만 발등 담구면 장대키 히죽이던
달팽이관
오름의 저 깊이를 무슨 수로 재려 했나
헛딛는 발걸음에 놓쳐버린 무게중심
활오름 휘어지던 생, 오롯 버틸 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