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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백점례 시조시인 작품방 등록일 2018.05.09 16:56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1039

백점례.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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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점례

충남 부여 출생,2011년 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천강문학상 대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신인상 수상

2017년 대산문화재단 대산창작기금 수혜

시조집 <버선 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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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무렵

 

 

비 그치고, 밟는 흙이 밥처럼 부드럽다

 

속 훤히 보이는 가난한 터전으로

 

저만큼 햇살은 벌써

 

밭고랑을 치고 있다

 

 

지난날 엉킨 덤불도 풀씨의 울이 되고

 

바람과 살얼음도 깍지 풀어 넘는 길에

 

떡잎이 기지개를 켜나

 

발바닥이 간지럽다

 

 

 

달빛 수런거리는 뜨락

 

 

오래 본 대문 쪽을 한 겹쯤 뜯어내고

 

헛말 같은 발자국도 말갛게 지워보며

 

내 집의 낡은 배경을 걷어내는 달빛 자락

 

벗겨진 허물이 바스락 구르는 뜰

 

내밀한 전개 속에 단추 다 풀어 놓고

 

서늘한 달빛 체온에 마른 속을 씻는 밤

 

 

 

유리 가게 반짝거린다

 

반짝, 불안하다

반짝, 또 위험하다

 

수천 개의 칼날을 숨겨 놓은 차가운 집

날 끝이 튕기는 서슬에 햇살이 떨고 있다 

 

겨누어 찌를 건가

눈동자 거리를 쫓고

 

깍지 풀린 파편들이 일순간 날아가서

무엇을 베어 버릴지 유리판이 칼칼하다

 

한 무리 갈라낼 듯

배후가 쏱아질 듯

 

고요히 긴장하는 투명한 화면 너머

어긋난 뒷모습들이 총총히 사라진다

 

 

금강노을

 

 

쓸쓸한가

황홀한가

불 번진 수면으로

천 갈래 이랑을 물미는 날이 오고

화염에 소스라치며 뗏마 한 척 달아난다

 

붓끝 세운 마른 갈대 퇴고하는 대서사시

탁류 따라 들끓었던 갈피 많은 줄거리

물굽이 돌고 돌아와 숯불 다시 풀무질하고

 

기우는 한순간의

땅과 하늘 쓸어안은

꽃망토 발치에 앉아 젖은 나를 말린다

저무는 이름들이여

휘황하다

뜨겁다

 

 

항구다방

 

 

헌 지팡이 돛대 세워 꼿꼿이 땅에 꽂고

목선 되어 떠가는 골목길의 김 노인

얼룩진 바다일기 속

마지막 벗 찾아간다

 

눈짓도 시들해진 귀퉁이에 정박한 채

가는 귀 이 씨와 지난날 투망질 하며 

잡힐 듯 거품의 파도

힘껏 저어보는 일

 

깃을 접는 물새들이 폐선에 걸린 저녁

막바지 꽃잎같이 검버섯도 후끈해져

찻잔에 갇힌 먼 바다

물보라를 삼킨다

 

 

 

쪽방촌 소식

 

 

쪽수를 채워가다 시린 말문 흘렀는지

 

알을 밴 곰팡이가 기습해온 벽을 넘어

 

몇 음절 반짝거리며 창문에 붙어있다

 

선잠을 털어내고 불꽃 심지 당겨서

 

오랜 기도로 끓는 새벽밥을 짓는다

 

갈앉은 희망을 일듯 햇귀를 조리질한다

 

닳으며 빛을 내는 세간들이 지키는 방

 

봉합한 허리 세워 쪽문들은 어깨 겯고

 

키 낮춰 벙그는 꽃도 힘내어 붉어 있다

 

 

 

나뭇잎 물음표

 

 

운명이 의문이다

 

수만 바람 길을 읽다

 

열정의 피가 끓어 울긋불긋 낯붉히다

 

낙담한 이파리들이 왁자한 입 닫는구나

 

 

날려버린 질문이 발 아래 수북하다

 

외곽의 벼랑 위에 쌉쌀한 별빛 품고

 

사는 일 뜨거웠었다

 

손을 터는 개옻나무

 

 

 

나팔꽃 피는 아침

 

 

어둠을 막 벗겨 낸 푸른 뺨 나팔꽃이

봉인했던 소식을 방글방글 풀어놓자

새벽의 환한 귓바퀴

쫑긋하게 당겨진다

 

새롭지 않은 듯이 새로운 또 하루가

껍데기로 뒤척이는 내 이마에 닿아서

흑백의 불량한 꿈은

개수대로 달아나고

 

수많은 해돋이를 허드레로 버려온 날

앙가슴 울려오는 명징한 나팔소리

내 안에 갇힌 꽃일까

목젖이 시큰하다

 

 

 

싸락눈

 

 

쓸데없이 많은 말을 쏟으며 살아왔다

 

고르지 못한 바탕에 발길이 미끄럽다

 

함부로 뿌렸던 말이 위험하게 밟히는 날

 

몸살을 앓으며 허물을 벗는 한 때

 

버린 눈발 고스란히 받아 안는 강을 따라

 

반성의 일기를 적나, 붓이 된 새 한마리

 

 

남천

 

 

 

꽃제비 아이들이 거기 모여 있었네

 

급히 먹다 흘렀는지 얼룩의 라면 국물

 

햇살 끝 담 모퉁이에 재채기를 쏟아냈네

 

 

 

역설처럼 날리는 사락눈 동무 삼아

 

마른 손가락에다 빨간약 덧바르고

 

귓볼이 하얗게 질린 골목을 기웃거렸네

 

 

 

쓸쓸한 얼굴

 

 

 

어느새 저녁인가요?

주름 사이 잔별이 몇 개

 

시든 풀꽃 앞에서 그 빛 오래 지우려다

 

죽은 꿈

슬픈 눈빛의

미라를 보았어요

 

또 한 점 유산되었던

젊은 날의 싹인가요?

 

박제된 봉오리에 물기를 발라주며

 

벙글다

덧이 난 멍울

남몰래 어루만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