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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김영순 시조시인 작품방 등록일 2017.08.20 16:04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1768


김영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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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제주 의귀리 출생, 2013년 영주신춘문예 시조당선

2013년 <시조시학> 신인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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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밀

 

 

어떤 꽃은 밤에도 향기를 쏟아낸다

새벽, 벌장 가다 말고 힐끗 본 꽃숭어리

단물 다 빨렸는데도 꽃은 그냥 멀쩡하다

 

솔가지를 태운다, 오늘은 꿀 따는 날

꿀 한 모금 들락나락 부웅~붕 날갯짓 소리

수동식 채밀기 돌려 훔친 꿀을 훔쳐낸다

 

벌침 몇 방 맛봐야 꿀 한 통을 얻느니

내 안에 밀봉된 채 다독여 온 사랑아

종낭꽃 채밀의 시간

탈탈 털린 사려니숲

 

 

 

꽃과 장물아비

 

 

봄이면 따라비오름

초여름에 사려니숲

유채꽃 종낭꽃 찾아 벌통도 따라 간다

이사에 이골 난 차를, 끌고 가는 유목의 피

 

나더러 장물아비라고?

미필적 고의라고?

나는 단지 벌통을  꽃 곁에 놓았을  뿐

꽃 속의 꿀을 훔친 건, 저들의 짓 분명하다

 

벌의 몸을 통과해야 꽃물이 꿀이 되듯

내 가슴을 관통한 저 못된 그리움아

좌판도 흥정도 없이

야매로 팔고 간다

 

 

 

갑마장길1

- 나를 따르지 마라

 

 

내 가계 내력에는 말울음 배어있다

임진란에 전마를 진상했다는 할아버지

그 고삐 대물림하듯 내 동생이 쥐고 있다

 

"나를 따르지 마라"

'폭풍의 화가' 건너간 길

조랑말도 아버지도 다 떠난 황톳빛 들판

산마장 전세를 내어 말의 길을 가고 있다

 

음력 삼월 묘젯날엔 오름에도 절을 한다

고사리에 콩나물, 빙떡과 옥돔구이

누우런 말 오줌 냄새

따라가는 산딸기꽃

 

 

 

조간대 밥상

 

 

썰물이 나자마자 '밤하라 국하랴'

주문에 응답하듯 거품을 흘리는 게

바다는 하루에 두 번 조간대 밥상 차린다

 

좌대 위에 수석 얹듯 접시에 올려놓은 섬

보말을 보말끼리 집게는 집게끼리

한 숟갈 일용할 양식 탁발하고 있었다

 

모처럼 보말수제비 둘러앉은 친정집

이맘때쯤 일 마치고 돌아오던 아버지

오늘은 그 빈자리에 노을이 끼어든다

 

 


동행1

- 49일

 

 

저 들녘 봐요, 아버지

금가락지 빛 보리밭

노릇노릇 자리돔도 함께 익는 저물녘

허기진 들녘 밥상에 별빛들이 모이겠다

 

알아요,

병중에도 눕지 않으려던 그 고집

칠일재 문전마다 조아리며 바친 뇌물

가끔은 어머니 몰래 건네던 술값만 같아

 

잘 갈게요, 파 싹!

항아리 깨듯 그렇게

사십구재 목탁 소리 고향 가는 그 길목

비로소 연화대 속에 들어앚는 아버지

 

 

 

아버지의 일기장 1

-동상凍傷

 

 

아버지의 일기장은 이제 내게 경전이다

곰팡이 핀 농협 마크 수무 권 째 다이어리

몇 권을 들춰보아도 농약 냄새 거름 냄새

 

삼십 년 전 오늘은  아버지가 눈 치운 날

과수원 한 귀퉁이 임시 저장 감귤 위에

연사흘 쌓인 눈 쓸다 발가락에 피어난 꽃

 

발에만 피었겠나, 손가락에도 피었겠지

손에만 피었겠나, 가슴에도 피었겠다

그 꽃잎 어머니 가슴에 녹지 않는 그리움

 

 

 

가장 안쪽

 

 

잠시 잠깐 뻐꾸기 울음을 멈춘 사아

삼백 평 감귤밭에 삼천 평 노을이 왔다

넘치는 감귤꽃 향기 더는 감당 못 하겠다

 

이렇게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시간

하루일상 시시콜콜 어머니 전화가 온다

말끝에 작별 인사를 유언이듯 하신다

 

어제는 방석 안에, 오늘을 속곳 속에

당신의 장례비를 꽁꽁 숨겨두었단다

치매기 언뜻 스며든,

세상의 가장 안쪽

 

 

 

쌀점

 

 

해마다 봄빛 돌면 통과의례 치르듯

식구들 손 없는 날 그것도 짝숫날에

남몰래 저녁 어스름 불빛러머 다녀간다

 

어머니는 무당을 나그네라 부른다

부엌에는 조왕신 애들 방엔 삼승할망

달랠 신, 또 하나 있네

능청스레 뜨는 달

 

"인정걸라 인정걸라"

요령 소리 댓잎 소리

내 사랑 고백 같은 심방사설 잦아들면

놋쇠 빛 산판에 걸린 식솔들 신년 운수

 

공기 놓듯 쌀 몇 방울 휙 뿌렸다 잡아챈다

홀수는 내던지고 짝수만 받아 삼킨다

입춘이 갓 지난 봄빛

씹지 않고 삼킨다

 

 

 

봄비

 

 

아무 기척도 없이 다녀간 봄밤입니다

 

모처럼 길을 나선 서귀포 봄밤입니다

 

백목련 손수건 몇 장

 

툭, 놓는 봄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