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항아리/ 서운암에 가면/ 겨울나무/ 감자/ 동백꽃/ 구절초/ 산행/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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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결 고운 황토흙에 정갈한 물을 붓고
그대 그리는 맘 둥글게 사려 담아
손금에 쌓인 세월도 무늬 새겨 넣습니다
무른 듯 설익은 나도 불가마에 던집니다
서서히 불이 달면 잿빛 어둠 엷어지고
단단히 웅근 매무새 새 목숨은 받습니다
옷섶을 여며 앉아 먼 하늘 우러릅니다
내 살 속 출렁이는 아픈 생애 헹군 자리
정화수 항아리 가득 맑은 빛을 냅니다
서운암에 가면
통도사 서운암 뜰엔 배불뚝이 옹기가 산다
떡 벌린 큰 입으로 하늘 성큼 베어 문 채
곰삭은 시간이 쿵쿵 배냇짓을 하고 있다
이승 저승 다리 놓은 천필만필 모시 삼베
오색 물빛 곱게 들여 바지랑대에 널고 있는
노스님 등 굽은 몸짓이 허위허위 춤을 춘다
감로수 목 축인 햇살 산그늘 업고 나서는 길
풍경소리 독경소리 은근슬쩍 계곡물 소리
쪽물 든 손톱 밑 반달 비스듬 하늘에 걸고
가만히 옹기 옆에 키를 낮춰 앉아 본다
빈 만큼 차오르는 무욕의 푸른 바람
채우고 비우는 법을 그는 먼저 알고 있다
겨울나무
물빛 생각 지운 잎새
그마저 뚝 떨쳐내고
실핏줄 잔가지도 폭설 속에 다 내어 주고
하늘 귀 열린 나날들
바람소리 듣는다
감자
한 끼 식사를 위해 감자 톨을 깎는다
검은 비닐에 담겨 한쪽으로 밀쳐진 채
바깥이 궁금했던가 파란 눈을 내밀었다
세상이야 눈 뜨고 봐도 아득히 캄캄한데
이리저리 툭툭 차이며 구른는 법도 배웠다
더러는 날 선 모서리 온몸으로 받아내고
내 안에 두고 온 뿌리 상한 기억을 깎는다
칼날 지난 자리마다 뽀얗게 살이 돋아
하늘은 둥근 길 하나 지금 막 열고 있다
동백꽃
종일토록 너 그리워
울대는 내려앉고
뼛속 저 밑 진액까지
노랗게 토한 지금
흥건히 피를 쏟으며
밤이 뚝뚝 지고 있다
구절초
길조차 수척해진 그리움 풀린 자리
저문 날 그대 향해 뒤꿈치 살풋 들고
무너진 기억 한자락 백지 위에 놓는다
편지인양 날던 꽃잎 빈 잔 가득 넘쳐나고
옹이 져 박힌 설움 갈빛 바람에 풀려 온다
한 접시 여린 자태로 꽃공양을 올린 정토
사위는 순간 앞에 삶은 더욱 빛나는 것
흙 묻은 손을 덮고 굽은 가을 접어 보면
대궁의 마른 향기로 서사시를 엮고 있다
산행
골바람 한 손 퍼질러 얼굴 씻고 산길 간다
찌르륵 벌레 울음 귀를 세운 다람쥐
옥죄던 삶의 무게를 여기 잠시 부린다
발끝에 구르는 돌 낚아채는 나무 등걸
원시로 돌아온 지금 신의 피조물일 뿐
수피 속 흐르는 물소리 나를 잠시 방생한다
산정을 밟고 서서 먼 도심 내려다본다
바둑판 씨줄 날줄 뒤엉킨 삶의 질곡
마천루 끝없는 욕망 골다공증 앓고 있다
부딪쳐 깨어나는 한 줄 생각 쏟은 폭포
일상의 잡다한 티끌 물보라로 흩어 놓고
반듯한 뼈대를 세워 회귀의 길 다시 간다
연
역마살 바람 안고 흰 새가 솟아오른다
푸루루 떨친 목청 가슴 환히 씻어지면
세상의 현기증 온통 시원시원 흘러간다
내 안에 철썩이는 골 깊은 밀물 썰물
모나고 시린 일들 아득히 띄워 날리면
뻥 뚫린 가슴 가득히 푸른 물빛 새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