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정원반석庭園盤石/ 벌목장伐木場에서/ 엽서/ 돌아가는 길 4/ 해와 달 새겨 넣고/ 름 동행同行/ 우렁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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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반석庭園盤石
정주면 환한 살결 눈길 주면 젖은 바람
세월을 주름잡듯 벌레 한 마리 기어가고
내 뜰에 옮겨 온 수십년
돌도 이젠 말을 건넨다
세월도 금이 가는가 풀씨 하나 자라나서
그 풀씨 가녀린 잎에도 이슬방울에 올라붙고
갈수록 생각은 무거워
나이테는 또 아파라
달빛 내리는 밤은 솔삭마저 밝혀들고
속으로 다지는 마음 나를 불러 뜰에 내린다
가만히 손길 닿으면
석향錫香마저 묻어 났어라
벌목장伐木場에서
원목이 쌓인 벌목장 하늘도 더미로 쌓였다
내 가슴은 노목이 되어 구멍이 숭숭 뚫리고
기운해 찬바람 소리가
피리를 불고 있다
나무들 푸르른 고뇌 고즈넉이 숨죽이고
산울림 가로누운 채 수액樹液도 눈 감았다
다음날 내비칠 문양
다듬어진 질양이여
한 생을 잘라내면 장목長木 만한 길이 인데
비 젖은 원목장原木場에 하루 해가 질척인다
예순 해 높이로 쌓이면
그 무게를 어이리
엽서
서울 종로구 사직동 262-25번지 이 일향 앞
낯 익은 만년필 글씨 검은 소인 직혀있는
주소를 모르는 그 사람의 엽서를 받고 싶다
"안부 늦었네요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아무 뜻 없어도 글자 속을 읽고 또 읽을
세월의 저족에서 보내온 엽서 한 장 받고 싶다
돌아가는 길 4
어쩌다 이 세상 와서
나는 혼자 앉았는가
기다려도 오지 않을
그 세월을 등에 지고
지는 잎
바람에 날리며
빈 하늘만 지키는가
걸어 온 길 다 묻히고
가야 할 길 기약 없다
서산없어 가는 해도
눈시울이 젖었는가
가다가
뒤돌아보며
차마 재를 못 넘는다
해와 달 새겨 넣고
인왕산 닮은 산세 돌 한 덩이 얻으려고
나는 지팡이 이끌고 서른 봄을 헤맸어라
해와 달 다 새겨넣고
내 사랑도 새겨넣고
아무리 산이 높아도 구름은 누워 넘는데
나는 왜 앉아 있어도 네 생각을 못 는가
뻐꾸기 목 메이지 마라
푸른 산에 못 박힐라
구름 동행同行
산처럼 무거운 외로움
못 견디게 찾아든 밤
한 생을 달려 왔는데
닿지 못한 꿈이라네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라
나 혼자뿐 오직 빈손뿐
세월을 다 살았는데도
아무 대책 서지 않고
팔 린 고사목枯死木이여
이별 은 독경소리여
산문 山門에 벗어 건 그림자
구름이나 동행할거나
우렁이의 노래
썰물 나간 이 갯벌엔
갈매기도 자취 없고
빈 껍질 우렁이가
제 몸 안고 혼자 운다.
구름도 부서진 구름
길 떠나간 포구 밖.
다스린 밀물 썰물
혼자 누운 이 한바다
비 짖은 꽃구름은
어느 배에 실려가고
돌아온 와갈기만
하늘 홑는 나래짓
-강화 앞바다에서 음력설날.
<시조시학 201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