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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박명숙 시조시인 작품방 등록일 2016.02.07 20:31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582

=============================< 차  례>=============================

초저녁/ 처서/  봄날/ 토로스/ 그믐달/ 銀竹/ 잎그늘/ 개상사화/ 왕십리/

실상사 가는 길/ 해바라기/ 다알리아, 엄마/ 그해 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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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풋잠과 풋잠 사이 핀을 뽑듯, 달이 졌다

 

치마꼬리 펄럭, 엄마도 지워졌다

지워져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

 

처서

 

귀뚜라미가 돌아왔다

못갖춘마디로 운다

허물 벗은 첫 소절이 물먹은 어둠을 파고든다

 

낯익은

울음을 만날 때도

모노드라마로 운다

 

가슴에 목젖을 묻고

초사흘 달처럼 운다

 

덜 여문 곡절들이 풀씨보다 쌉싸름하다

 

가다가

낯선 울음 채면

귀청을 딸각, 끄기도 한다

 

봄날

-진평

왕은 죽어서

젖무덤만 남아서

 

남풍 부는 아침이면

약속처럼 젖이 돌아

 

꽃다지

떼로 몰려와

우 ․ 우 ․ 우 ․ 우 기어오르네

 

토르소

 

잔머리도 

굵은 머리도

 

이제 더는

굴릴 수 없어

 

무엇을 받쳐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나

 

몸통만 

덜렁거리며 

 

길을 잃고

길을 갈 뿐

 

그믐달

 

닳아빠진 호미 날이 하늘을 긁고 있다

가문 비탈 베고 누운 어머니의 밤마다

아이는 아득히 따라와 젖무덤을 헤집는다

 

타다 만 불티들이 어둠 속 날아올라

거친 골 늙은 빰에 검버섯을 앉히는데

산밭은 흰 뼈 내밀며 머리맡에 뒤챈다

달빛 아래 누운 길 물레로 감아내고

허리 긴 근심 깨워 호미 날을 세우면

문고리 흔드는 냉기 생무릎을 저민다

 

어수선한 한밤을 다시 잠들지 못한다

뒤란의 감잎 몇 장 낮은 그늘 흔든다

평생의 허기진 맨발 사립 밖을 나선다

 

이빨 빠진 바람만 세월을 우물거리며

머리칼 흐트러진 고샅길로 달아나고

하늘엔 은빛 호미날 세상을 매고 있다

 

銀竹

 

까마귀 고개

 

은빛 소나기

 

댓살처럼 내리꽂히는

 

큰외갓집 가는

 

산길

 

똬리 튼 고요 한 채

칡덤불

 

기어나오며

 

푸른 날숨 뿜고 있다

 

잎그늘

 

거미 떼처럼 몰려다니며

그녀는 즐겁다

 

일렁이는 햇살 무늬

틈샛짓도 물 오른 날

 

초름한 느티잎 마다

말문들을 트고 있다

 

개상사화

 

초경을 치르는 날 선운 숲은 어둡다

 

눈썹 긴 처녀들은 혼령보다 서늘한데

 

도솔천

 

낭자한 선혈이

 

세상으로 새고 있다

 

왕십리

- 소월 생각

첫 어둠이 소문 없이 돋고 있는 왕십리

다급한 귀갓길을 자동차들이 쏟아지는데

몸 세운 포장마차 불빛 머리카락이 카랑하다

 

어둠이야 발 빠르게 골목을 앞장서지만

인기척 하나 없이 가는 목을 뒤채는 길

헛헛한 저녁의 뒷덜미 이십 년대로 젖는다

 

몇십 리 더 써먹어도 끄떡없을 불빛 속으로

왕십리 네거리의 심장을 관통하며

어둠은 장대비처럼 씨알 더욱 굵어지는데

 

마음 지레 장마 지는 으슬한 오르막길을

뜨거운 노래 들려온다 젖지 않고 따라온다

하늘이 떠나가도록 어둠이 목을 놓는 곳

실상사 가는 길

 

남녘 들 나지막이 외가처럼 앉은 절집

해묵은 간장 냄새 독경 소리에 배어들면

천왕봉 늙은 젖가슴 노을보다 따뜻하다

 

한세상 허기진 목숨 어질머리로 돌아들 때

화엄 천년 소롯길은 똬리를 무장 풀고

불 지핀 배롱나무꽃 산문 밖이 환하다

 

해바라기

 

고요가

형벌보다

무서운 아이와

 

고요가

은총보다

그리운 어른이

 

애타는

해바라기처럼

마주 보고 삽니다

 

다알리아, 엄마

아리도록 붉은 그늘

뒤란에 심어놓고

 

볕 달은 한나절

익은 장을 뜨는 엄마

 

바람은 홑적삼 가득

첫더위 닦고 가네

 

그해 입동

수인선 협궤열차 열세 시 반 차표 한 장

대합실 휑한 속을 갈바람만 뒹굴었던가

개찰구 문이 열리자 내 오후도 개찰되었다

 

옹색한 그 외길을 어떤 힘이 끌었는지

욕망이나 절망이나 가난 같은 바퀴들이

들바람 맞서 껴안고 얼마나 달렸는지

 

서해안 노을 앓으며 변두리를 돌던 일상

간밤 꿈은 굴러나가 통로 사이 걸리고

경적은 갯벌에 빠져 허리를 끊어냈다

 

끝물로 터지는 숨결 코끝이 달아올라

빗장 건 염전 몇 채 갈밭머리 내려앉으면

시간도 굼뜬 몸 일으켜 들불을 놓아가고

 

무거운 삶 매달고 건너가는 군자 달월 소래

첫눈이 곧 내릴까 여위는 걸음 잴 수 없는데

페역엔 쿨룩이는 풀꽃만 입동을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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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 시인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석사과정 중퇴.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남원행」이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단풍 속으로」가 당선, 현재 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