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생강꽃/ 판잣집 거울/ 다홍빛 서정/ 요양원에서/ 새벽 독경/ 흑장미/ 가을 뜨락/
새벽/ 양파/ 가을 숲에서의 명상/ 민달팽이 보법步法/ 폐교를 가다/ 봄이 와 눕다/ 내 숲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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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꽃
고사리
손을 펴면
별빛이
쏟아진다
만지면
팽 돌아설 듯
톡 쏘는
너의 향기
봄밤도
노랗게 취해
달빛 강을
건너가네
판잣집 거울
가파른 돌계단이 길어서 휘어지고
귀퉁이 4층 건물 판자 위의 수선 집
닳아서 뭉툭해진 손, 바람까지 쿨럭댄다
비켜가는 겨울 볕이 그늘진 고독 같다
뾰족한 구두 한 짝 취기로 놓고 가면
넋 놓고 마주한 회벽 새순 돋는 담쟁이
다홍빛 서정
페인트칠 벗겨진 간판 걸린 이발소
삯바느질 푼돈 받아 장만한 함석집
아직도 뉴스 속에는 자막처럼 살아있다
하나둘 아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가고
사진 속 빙그레 웃던 시간마저 희미하다
돋보기 건너편으로 다가오는 낯선 여자
요양원에서
속도감을 잃은 채 공터에 버려지는
가속으로 달려와서 무엇이 남았을까
무중력 타이어끼리 마주보는 얼굴들
노을에 기대이고 휠체어에 앉은 채
가만히 눈동자를 저렇듯 내려놓자
생이란 큰 자국 하나 조용히 지워지는
새벽 독경
혼자 걷는
돌길도
장삼처럼
푸른 새벽
골짜기 돌고 나온
이슬 묻은 독경소리
암자는
벙그는 연꽃
운무 속에
떠 있다
흑장미
울밖에 기다림은
해종일 검게 탄다
그리움에 멍든 마음
먹보다 더 무거워
뼈 하나 가슴에 묻고
숯불인 양 뜨겁다
가을 뜨락
꽁지 하얀
새소리
동동동
떠가는,
안개로
반쯤 가린
산 아래
작은 박샘
격자 창
열린 사이로
오동잎이
지고 있다
새벽
누가 걸어갔을까
투명한 깊이 저쪽
어둠이 번져 있는
티끌 하나 없는 고요
손 닿자
조용한 소명
허공처럼 벙그는 꽃!
양파
몇 구비를 돌아야
너에게 닿을 수 있나
겹겹 성곽 두르고
하얀 속살 감추고
끝끝내 숨긴 마음을
나이테로 감은 너
가을 숲에서의 명상
풀무치 늙은 부부 숲 속으로 숨는 시간
가을은 하늘 깊이 우물처럼 고이고
구절초 보랏빛 꽃은 어제보다 진하다
버들치 떼 지어 하얗게 놀던 여울목
오늘 밤 귀뚜라미를 날갯짓도 투명하리
여름내 목이 쉬던 그 젊은 청매미는
느릅나무 아래에서 며칠 전 입적했다
잘 익은 도토리 몇 개 몸을 뉘는 지구 한쪽.
민달팽이 보법步法
형형색색 불빛들이 서서히 빠져나간
깊은 잠 속으로 벌거숭이 집이 한 채
우거진 숲을 헤집고 좁은 길이 나 있다
덜 익은 낙과들이 입안에서 부서진다
습기 밴 외벽에다 눌러 적은 이름들
언제쯤 부랑아로 떠돈 이곳서 깨어날까
난간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느려진 속도만큼 잠적했던 시간들이
갓 헹군 햇살이 되어 연골처럼 푸르다
폐교를 가다
목청껏 부르면 와르르 반짝이던
버려둔 운동장에 누군가 찾아올 듯
아직도 푸른 종소리 호명하며 서 있다
직박구리 한 쌍이 날아든 빈 교실엔
연필로 그리다 만 기억의 뒷모습이
헐거운 풍금 소리로 서성이고 있었다
봄이 와 눕다
절 마당 한쪽으로 볕살이 모인 연못
막 바위 그늘 아래 실뱀이 또아리 트는...
이승의 허물을 벗고 저리 누운 늦은 봄
사계 밖 누가 와서 서성기고 있는가
가쁜 숨 되짚고 물그늘 쟁이면서
눈부신 수련 한 송이 지금 막 피고 있다
내 숲의 비밀
언제나 편안했던 그 길 한 쪽 정거장
엄지를 깨물면서 숨소리 죽여가며
나 혼자 읽어 새기던 울 아버지 비밀 일기
자정을 한참 지나 하현달 가는 허리
궁지 몰린 월사금 입술 말라 한숨짓던
등 굽은 세월 저편을 쑥꾹새도 와 울었다
돌아보면 허물 같은 그리움의 유산인데
삘기 꽃 환한 골짝 고향 집이 그립다
흙벽의 그 바람소리 지금도 들리는가
메마른 하늘이고 논바닥 갈라지던
참았던 울음들을 이제 다 쏟고 싶다
아버지 다랑이 논에도 단비 흠뻑 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