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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정혜숙 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 등록일 2022.06.22 13:58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260
정혜숙.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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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숙

1957년 전남 화순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조시학 젊은 시인상, 무등시조문학상,
오늘의 시조시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2012년과 2021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 받음
시조집 <<앵남리 삽화>> <<흰 그늘 아래>>,
현대시조 100인선 <<그 말을 추려 읽다>> 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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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문장을 읽어요


초서체의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요
맑고 아름다운 나비의 홑겹 노래
읽힐 듯 읽히지 않는
쓸쓸한 비문祕文이죠

나비를 부축하는 바람의 행려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초로의 저 남자
마음이 출구를 잃어
안개 속에 갇혀요

서풍의 갈피에 희미한 울음 몇 올
꽃의 이마 쓰다듬는 봄의 미간 어두워요
누구나 세상에 와서
조금씩 울다 가죠


어디에도 없는 다정


흠결 없는 문장은 읽기도 전에 사라진다
시효가 지극히 짧은 아름다운 꽃의 서체

이제 나 어디로 가랴
꽃이 저리 지는데

한 뼘 남은 햇살이 서녘에 위태롭고
한지에 먹물 스미듯 어둠이 번진다

끝까지 와버렸구나
어디에도 없는 다정

바람 앞에 맨몸으로 뒹구는 생이 있어
당신은 이마를 짚어 그 생을 좇아간다

후미진 골목 끝에서
근조등이 흔들린다


슬픔을 운구하듯이


누군가 북채를 들어
둥둥 북을 울리자
세간의 슬픔이 죄다 서녘을 향한다
어스름 적당히 내려
울기에 좋은 시간

옷섶을 적시며
당신이 떠난 후
한 생을 건너가는 얇고 추운 문장들
슬픔을 운구하듯이
새들이 날아가고


거긴 여기서 멀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오늘도 잠은 멀다
무표정한 시간은 여전히 나를 비껴가고

어둠의 봉인을 뜯는
흰 달이 높이 떴다

무딘 칼날에도 마음은 움푹 파이고
소리 내어 울지 않아도 옷섶이 흥건하다

지명을 모르는 바람
위로처럼 건듯 분다

거긴 여기서 멀다, 그리운 은적사
도라지꽃 보랏빛 문장 아직 거기 있는지...

때로는 네가 그립다
숨어 살기 좋은 곳


거기도 새가 우나요


해마다 여름 초입 산을 내려오는
처음도 끝도 없는
새의 노래 혹은 문장

하늘엔 흰 달의 실루엣
유랑하는 구름들


그쳤다 다시 울고
반 박자 쉬어 우는
새의 음독으로 그예 귀가 젖는 밤

당신도 혹시 듣나요
거기도 새가 우나요


추수秋水


풀벌레 가늘게 울어 초록이 푸석하다

지난 계절의 행로는 대체로 어지러웠으나

당신이 근황을 물어 오면

나는 늘 잘 있다 했다


기척 없이 붉어지는 산기슭의 나무들과

작은 오목눈이들의 부산함을 살피다가

천천히 귀로에 든다

반음 높아진 물소리


먼 데서 온 묵독이다
-봄맞이꽃


사기 접시에 담겨있는 맑고 흰 꽃의 말

손대면 부서질 듯, 먼 데서 온 묵독이다

묵독에 귀 기울이다

잠시 균형을 잃었다

소문도 기척도 없이 이울어가는 봄날

네 말은 내게로 건너오지 못해서

서녘의 간찰이 되었나

차마 읽지 못한다


저녁의 굽은 등 너머


뒤란의 새소리 몇 닢 옮겨 적지 못한 채
하루를 탕진했다, 행간이 적막하다

어둠은 만상을 지우먀
저잣거리 배회한다

손에 쥐면 바스러지는 문장은 가엾고
온기를 잃은 것들은 까무룩 멀어진다

저녁의 굽은 등 너머
글썽이는 어린 별


환절기


가혹한 오독이다 읽던 책을 덮는다
찬물에 손을 담가 쌀을 박박 씻는다

다정은 여기서 멀어서
모로 누운 등이 춥다

민낯의 문장을 머리맡에 둬야겠다
수사를 모두 버린 간명하고 투명한...

비로소 길이 보인다
한 계절이 저문다


당신, 조금 웃었다


보던 책 내려놓고 조금 더 멀리 갔다

쉼표 같은 구름 몇 점, 안색 밝은 나무들

조용히 기척을 하는

보풀 같은 잎눈 꽃눈

5촉 전구의 밝기만큼 어둠이 비껴 앉고

세간의 묵은 그늘 시나브로 묽어지는

천지간 물오르는 봄

당신,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