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국
1958년 경기도 양주군 덕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고향인 동두천 솔안골에서 살고 있다.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대 문창과와 경기대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철도청과 법률회사에서 20여 년 근무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2001년 계간 『시조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이호우시조문학상과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는 아르코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내 마음속 게릴라』 『명왕성은 있다』를 동방기획에서, 『난 네가 참 좋다』를 실천문학에서 출간하였다. 평양기행문 『평양에서 길을 찾다』를 화남출판에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 콘텐츠 제작사업 선정 평론집 『시조의 아킬레스건과 맞서다』를 지우북스에서 출간하였다. 한국시조시인협회와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한국작가회의 시조분과 위원장과 현대사설시조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
남산모루 들깨꽃
-동두천
큰이모 사시던 남산모루 옛 집터엔
루시킴 몸내 같은 들깨 꽃 한창이다
문간방 세 들어 살던 스물세살 아가씨
장 구경 나가자며 내 손을 꼭 붙잡고
팥죽을 사주면서 환하게도 웃던 얼굴
고향에 돈을 부치곤 돌아서서 울었지
콜로라도 비행기는 무사히 탄 것일까
들깨 꽃 향기에는 소문도 멍울지네
초콜릿 쥐어 주던 그 손 아직도 촉촉한데
요양원 접시꽃
가지마다 서러운 엄마의 원을 품고
높게도 자랐구나 붉은 꽃을 달고서
요양원 접시꽃 마음 한여름이 바쁘다
활짝 핀 꽃송이는 짭조름한 엄마 미소
인중이 참 길었던 그 얼굴은 아득하고
한겨울 뱃전에서 헤어진 칠십 년도 저무네
짚풀 같은 육신에도 마천령摩天嶺은 손짓하고
창밖에 휘청대며 붉게 타는 꽃술에는
구십 넷 단천 端川댁 꿈이 까무룩 졸고 있다
겨울, 자재암自在庵
해탈문 풍경 끝에 매달아 둔 눈물 한 점
사나흘 날 찾아와 들창문을 흔들었다
다 말라 살피도 흐린 그 알량한 기억들
바람에 멍이 들고 속정에 부대끼며
포도시 감추어 둔 내 좁은 바자울에
소요산 消遙山 붉은 단풍만 나뒹굴고 있구나
드러난 상처에다 소금을 뿌려 놓고
쌩하게 돌아섰던 깜깜절벽 그 시름을
이제사 여기 놓는다 우리들의 보풀들
꿍꿍이속
산막 옆 개복숭아 연분홍 한창이다
앞서 간 작은 누이 젖가슴 속살처럼
돌아서 옷깃을 여미네 그렁그렁 눈망울
붉은 겹겹 꽃잎 속에 향기를 숨겨 두고
넌 꽃만 이브구나 시금 털털 떫은 맛
귓가에 쟁쟁히 들리네 호랭이 엄마 말씀
겨울, 산막
- 동두천
찻길이 끊겨 버린 한겨울 산막에는
포실한 난롯가에 상처들이 모여 산다
복더위 고단한 기억을 눈밭에 잠재우고
찻물이 오글대는 토방은 착한 씨방
허기와 칼바람도 의젓하게 버텨 주고
언 산이 부르는 노래 찻잔에 우려 주네
은사시 두 그루가 번을 서는 시린 밤엔
배고픈 고라니가 아궁이에 몸을 녹이고
긴 겨울 헤쳐가야 할 목숨들이 기대 산다
앵두가 익을 무렵
(1)
산 두릅 연두빛에 햇볕이 스며들어
알싸한 봄 냄새를 남기고 떠나듯이
이별의 아픈 향기는 두고 가도 좋겠네
(2)
고양이 선하품이 연못에 스며들어
올챙이긴 꼬리를 조금씩 잘라 먹듯
지는 봄 어질머리도 열매 속에 품겠네
(3)
눅눅한 갈피마다 바람결로 스며들어
혼곤히 세 이레 쯤 알뜰히 보듬으면
먼 그대 쓰린 기억도 새빨갛게 익겠네
거푸집 인세
한마음 약국에서 받아 온 약봉지엔
노 의사 불호령이 한가득 따라왔다
수치에; 들락거리는 고혈압의 줄넘기
흔들린 발자국엔 흙탕물 투성이다
굽은 길 젖은 길도 골라 서지 못한 채
육십 년 내팽개쳐 두고 인세만 우려먹은
들피진 쇄골 아래 개울물도 말라버려
멀쩡한 마음 밭엔 우울이 진을 치고
원본은 먼지투성이 재판은 당치 않다네
새벽, 지하철
푸석한 작업복에 모자를 눌러 쓴 채
허물 같은 가방을 힘겹게 둘러메고
희뿌연 새벽을 연다 또 하루를 으깬다
날카롭고 재빠른 낯 설은 언어들이
다급한 억양으로 고단하게 부딪힐 때
다소곳 안내방송도 얼떨결에 비껴가네
노동의 허기만큼 무거운 눈꺼풀이
달콤한 토막잠과 만나는 한구석에
까무룩 코리안 드림 등허리가 외롭다
라면
손대면 바스러지는 저놈의 성깔에다
올올이 몸을 말고 곁마저 까칠하기는
앵돌아 등돌려버린 저 봉지 속 능구렁이
헛헛한 순간마다 마른 몸을 살라내면
은근히 여며주는 엄마의 괴춤처럼
뉘라도 외롭지 않다 살갑고 푸근하다
시름 타래 풀어내고 간을 맞춘 멀굴에는
알싸한 밤도 오고 쌉사름한 시름도 모여
백동전 몇 앞에서 두 무릎을 꿇는다
도선사 아침 공양
애틋한 시앗 하나 또 다시 받은 아침
무겁고 섬뜩해도 내치지 못 하겠네
기꺼운 목숨의 무게 지켜주실 한 그릇
나물이면 그냥 나물 간장도 그냥 간장
양념의 사치쯤은 애초에 접어 두고
날된장 쿰쿰한 맛에 조바심을 여미지만
웃자란 식욕대로 한 숫깔 더 담으면
혀끝에 눌어붙은 소태 같은 뉘우침이
잽싸게 딴지를 걸며 종지 위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