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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제주출생,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 오는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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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봄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 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 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기까지
몇 생을 돌아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 점 점이 될 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닫혀있다
폭풍우 심한 밤을 겨우 지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떠났다
어디쯤 놓쳤던 걸까
따라나설 수 있던 지점
헐거워진 궁합은 삐꺽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낡은 돌집에 저를 닮은 뒷문 하나
더 이상 할 말도 없이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닮아간다는 게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어
갈수록 모호해지는 너와 나의 경계에서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닫힌 채로
서있다
숨은 그림 스케치
빨간색 우체통 안에 그리움을 데생해
설렘을 터치하는 손바닥 문패도 달고
명도는 봄 햇살만큼,
휘파람도 그려봐
자연산 색채마다 자연산 추억이 돌아
백살된 팽나무와 돌도 안 된 백일홍이
마당의
평상에 앉아
별을 찾고 있었던
오밀조밀 오조리*
비 그친 수채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가 삐뚤비뚤 길을 묻자
담쟁이 이파리 사이 숨은 그림이 되었다
오조리 :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아래 있는 마을.
북촌 팽나무
피사체 노을 속에
흑백의 미학인가요
차렷 자세 세워놓고
나를 찍지 마세요
겨누어 나를 향하던
총구들만 같아요
뫼비우스의 띠
낮과 밤의 문턱은 어디쯤이었을까
악몽처럼 뒤집힌 해맑은 영혼들이
잔잔한 포말이 되어
사그라든
그 지점
천 일 동안 비 내리고
천 일 동안 물에 잠겨
목젖 더 깊숙하게 가라앉던 네 이름
종잇장 하나를 두고도 들리지가 않았지
어느
뱃길을 따라
다시 여기 왔을까
멈춰 선 자리에서 시간의 결 헤쳐보면
한 바퀴 세상을 돌아온
영혼들이 있었다
겨울 텃밭
제2막 무대 앞에 관객들은 오지 않았다
흥밋거리 다 빠지고 에필로그만 남아있는
저 남루 들깨나무가
겨울 텃밭을 지킨다
내 생에 클라이막스
아직 남아있을까
색 바랜 배경에는 조명마저 희미하고
이름도 대사도 없는 조연들만 남은 무대
겨울바람에 여무는 까만 뜻이 있었네
생生의 마지막 장
빈 육신 내려놓다
불현듯 깍지가 터진다,
봄의 씨앗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