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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Home > 시조감상실 > 시조시인 시집 엿보기
제목 김연미 시인 시집 엿보기 등록일 2020.07.14 09:43
글쓴이 시조나라 조회 355

김연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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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제주출생,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 오는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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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봄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 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 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기까지

몇 생을 돌아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 점 점이 될 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닫혀있다 



폭풍우 심한 밤을 겨우 지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떠났다

어디쯤 놓쳤던 걸까

따라나설 수 있던 지점


헐거워진 궁합은 삐꺽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낡은 돌집에 저를 닮은 뒷문 하나

더 이상 할 말도 없이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닮아간다는 게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어

갈수록 모호해지는 너와 나의 경계에서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닫힌 채로

서있다



숨은 그림 스케치



빨간색 우체통 안에 그리움을 데생해

설렘을 터치하는 손바닥 문패도 달고

명도는 봄 햇살만큼,

휘파람도 그려봐


자연산 색채마다 자연산 추억이 돌아

백살된 팽나무와 돌도 안 된 백일홍이

마당의

평상에 앉아

별을 찾고 있었던


오밀조밀 오조리*

비 그친 수채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가 삐뚤비뚤 길을 묻자

담쟁이 이파리 사이 숨은 그림이 되었다  



오조리 :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아래 있는 마을.

 



북촌 팽나무




피사체 노을 속에

흑백의 미학인가요


차렷 자세 세워놓고

나를 찍지 마세요


겨누어 나를 향하던

총구들만 같아요




뫼비우스의 띠



낮과 밤의 문턱은 어디쯤이었을까

악몽처럼 뒤집힌 해맑은 영혼들이

잔잔한 포말이 되어

사그라든

그 지점


천 일 동안 비 내리고

천 일 동안 물에 잠겨

목젖 더 깊숙하게 가라앉던 네 이름

종잇장 하나를 두고도 들리지가 않았지


어느

뱃길을 따라

다시 여기 왔을까

멈춰 선 자리에서 시간의 결 헤쳐보면

한 바퀴 세상을 돌아온

영혼들이 있었다



겨울 텃밭



제2막  무대 앞에 관객들은 오지 않았다 

흥밋거리 다 빠지고 에필로그만 남아있는

저 남루 들깨나무가

겨울 텃밭을 지킨다


내 생에 클라이막스

아직 남아있을까

색 바랜 배경에는 조명마저 희미하고

이름도 대사도 없는 조연들만 남은 무대


겨울바람에 여무는 까만 뜻이 있었네

생生의 마지막 장

빈 육신 내려놓다

불현듯 깍지가 터진다,

봄의 씨앗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