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라일보 신춘문예/시조-심사평]
생명력과 역동성 갖춰 한층 진화하길
예심을 거쳐 본심 탁자에 올라온 작품에는 저마다 아름다운 시어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려면 한 번만 봐야 하고, 제대로 보려면 세 번을 봐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본심에 임했다.
정형률을 기본으로 하는 시조장르 특성상, 제목과 초장 중장 종장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시력, 어휘력, 사고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전개시키는 신인들의 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목을 설명하는 낱말풀이 식 작품들이 있었다. 더구나 '나열과 전개'의 인식 부재는 등단 작가 작품에서도 곧잘 지적되곤 하는 문제가 아니던가.
결국 민달팽이가 그려놓은 실크로드를 "마침표/찍는 날까지 그려갔을 저 동선" 또는 "외로운/유고집 같은 얇디얇은 길"이라는 천윤우의 '민달팽이 길'에 심사위원의 눈길이 머물렀다. 그런데, 이 작품 초중종장에 "그려 놓은 쓸쓸한" "입지 않은 느릿한" 등등 시어선택의 안일함과 형용사 남발로 인해 가작에 머물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정형의 틀에다 글자 수를 맞췄다 해서 다 시조는 아니다. 시조라는 어휘에는, 이 시대 사람들 삶의 애환이나 에피소드 그리고, 장르 특유의 음악성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결국 서정과 서사의 알맞은 조화는 물론, 생명력과 역동성 그리고 새로운 시대인식이 갖춰져 있을 때 현대시조가 하향적 평준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시조시인의 양적 증가에 연연하지 말고, 한층 진화된 작품들이 탄생했을 때 시조의 자리매김이 한 층 뚜렷해질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고정국, 한희정
[당선소감]
천윤우 "멈추지 않아 닿을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길" 떠올려 본다. 가난을 핑계로 놓아버린 화가의 길 어른거린다. 이제 시조로 뜻 깊은 그림 그리고 싶다.
출근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때 입원한 60일이 시조와 현대시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그 뒤 문학에 대한 부족한 부분 채우려 2009년 만학에 도전하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과정을 수료했다. 한번 타오른 시의 불꽃 꺼지지 않아 '시인의 바다' 닿으려 달린지 17년! 바라던 시조시인의 길에 설 수 있었다.
배터리를 교체하러 가는 길에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선정됐다는 한라일보 담당자님의 전화였다. 비로소 선비로 입문한 것 같아 기뻤다. 돌아보면 우리 고유 시조가 그랬다. 3장 6구의 단단한 율격에 철학적 사유를 담은 글에는 고아한 향기가 난다. 숨을 불어넣은 오랜 문장에는 역사가 꿈틀거린다. 행간은 산을 품은 운무 같아서 읊조릴수록 깊어진다. 시가 산으로 오르는 것이라면, 시조는 마음까지 내려놓아야 닿는 해탈에 가깝다.
'민달팽이 길'에 따뜻하게 손 내밀어주신 심사위원 김정숙, 김연미, 고정국, 한희정 시조시인님께 감사의 마음 올린다. 새삼 돌아보니 지난 글이 부끄러워진다. '다시 시작하라,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 안는다.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손종흠 교수님, 2009학번 학우 및 선·후배님. 모든 지인들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긴 세월 묵묵히 동행해준 아내와 아들, 딸에게 못한 말,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0년 울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