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의 건축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시인 나름의 짜임과 얼개, 전략과 장치가 들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부실건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 점 신춘문예 응모작도 예외가 아니다.
<농민신문>의 ‘농민’을 의식한 나머지 응모작의 태반이 농경 정서다. 농촌도 엄연한 삶의 현장일진대 이런 현상을 배격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작품성이다. 적잖은 작품들이 설익은 상념과 넋두리에 그친다. 아쉬움이 남는 만큼 사유와 경험의 내밀화가 절실한 대목이다.
오랜 논의 끝에 최종심의 윤곽이 가려졌다. 가뭄 현장의 수로 공사에 생존의 목마름을 결부한 ‘와디’, 안정된 호흡으로 삶의 상처를 위무하는 ‘오래된 꽃밭’, 생존의 비애를 비탈의 눈발에 비유한 ‘추전역’, 칼과 꽃에 어머니의 생을 덧씌운 ‘억새’ 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사유의 깊이나 완성도 면에서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에 못 미쳤다.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은 발상이 광고(曠古)하다. 다산을 노래한 작품은 쌔고 쌨지만, ‘마임 무대에 선’ 다산을 읽은 기억은 없다.
무대는 다산이 거중기를 만들어 축조한 수원화성이다. 그곳에 버려진 ‘빈 박스, 빈 깡통에 빈 병서껀 넝마 조각’을 ‘한잠 든 사직’에 접목한다. 역사의 변전과 반복이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메시지의 진정성은 ‘받아든 푼돈 온기로’ ‘한 평 쪽방 찾아드는/ 노인의 굽은 등’에 있다.
‘긴 심서 적어가던 붓/ 그예 꺾고’ 맞는 ‘암전’. 여기서 작품은 끝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작품의 시작이다. 역사의 현재화, 형식의 자기화에 투철한 작품이다.
시조의 길에 들어섰으니 온 힘을 다해 완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낙선자들은 이번 경험을 심기일전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